이달을 맞이하여 세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 여기에 모인 당신의 어린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각자의 사정과 입장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당신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흠모하는 심정만은 하나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을 위하고 당신으로 말미암아 인연된 사실을 생각하며, 어떠한 생활환경에서나, 수난길에서나, 슬픈 자리에서라도 그 인연을 붙들고 기뻐하고 슬퍼할 줄 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혈육의 인연을 이어받은 자식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가 계신 것을 알았지만, 이 시간에 당신께서 어떠한 것을 굽어살피시고 누구를 찾아오시고 어떠한 이를 격려하시는가를 생각해 보게 될 때에, 이 땅 위에는 그러한 당신의 뜻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당신의 심정을 추구하는 무리가 이 땅 위에 없는 것이 사실이옵니다. 미비한 저희들만이 당신이 계신 것을 알고, 당신의 사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 뿐이옵니다.
아버님, 세계에는 잘난 나라도 많고 잘난 사람도 많지만 그러한 나라와 사람들이 당신과 인연을 맺을래야 맺을 수 없는 입장에 있으므로 할수없이 저희들을 상대로 하셔서, 저희가 당신이 찾고 싶으신 아들딸이 아닐지라도 저희에게 소망과 기대를 갖고, 찾고 싶으신 아들딸을 찾을 수 있는 그곳을 향하여 심부름이라도 저희들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 당신의 입장인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님, 심부름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개인을 찾으시고 가정을 찾으시고 민족을 찾으시고 세계를 찾으셔야 할 당신의 엄청난 사명을 부족한 것들이 맡아 감당하기가 너무나 어렵사옵니다. 이러한 것을 아시고도 저희들을 보내 놓고 걱정하시고 세워 놓고 염려하셔야 하는 당신의 사정이야말로 비참한 사실이요, 슬픈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님, 철부지한 이것들이 아버지 앞에 부복할 적마다, 옷깃을 여미고 아버지 앞에 모습을 나타낼 적마다 수고로우신 아버지를 진정히 우러러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을 위하여 역사의 배후에서 그 누구도 모르는 수난길을 개척해 나오신 아버지이신 것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비록 병신이라도 '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맺고 있다. 그 무엇을 가지고도 이 인연을 끊을 수는 없다'는 확고한 마음이라도 가져야 되겠습니다.
병신 자식을 가진 부모가 자기의 권위와 위신을 세워야 할 자리에서, 원수들이 조롱하는 자리에서, 그 원수보다도 낫고 우세한 아들딸을 앞에 놓고 아들이라 딸이라 부를 수 있을 때에는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세울 수 있겠지만, 원수들이 바라보는 자리에서 불구자들을 아들이라 딸이라 부르며 저 원수를 갚아 달라고 부탁할 때에는, 그 원수들이 얼마나 희롱을 하고 농락을 할 것인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들이 복귀의 도상에서 아버지를 그와 같은 자리에서 욕되게 한 사실이 한두 번이 아닌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내 모습이 그랬고, 내 걸음걸이가 그랬고, 내 행동이 그랬고, 내 삶이 그랬다는 사실은 당신 앞에 너무나 수치였습니다. 그 입장에서 볼 때 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날아가고 싶고, 사라질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사라지고 싶었던 것이 당신의 마음이 아니었사옵니까? 그렇지만 불구의 자식밖에 없는 당신은 그래도 이들을 붙들고 내적으로 사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아들딸을 통해 후대의 후손을 남기어 원수의 자식보다도 훌륭한 자식이 되기를 고대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아옵니다. 그러한 아버지 앞에 불구의 자식들이 아버지를 모욕시키는 입장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아버지를 배반하고 아버지를 거역하는 배도의 무리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적마다, 그들의 후손된 저희들은 당신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부끄러운 자신임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님이여, 그러한 저희들이 이 시간 당신 앞에 또 찾아 나왔사오니, 긍휼이 당신의 본질이요 자비가 당신의 본성일진대는 다시 한 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역사적 과오를 아는 저희들은 다시는 그러한 모습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당신이 저희로 말미암아 수치스러운 자리에 섰다 할진대 천만번 수치를 당하더라도 그 체면을 복귀해 드려야 할 사명을 느끼는 아들딸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백번 죽고 천번 죽더라도 이 길에서 원수들이 조롱하는 부끄러움의 환경, 원수들의 자식들을 세워 놓고 자랑하는 그 입장을 꺾어 놓고 밀어젖히기 위해서는 단 하나 이 길밖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수의 자식들은 서로서로 배반하고, 그 부모에 대해서 불효하는 길을 갈지라도 저희들은 효성을 하는 데 있어서 그들보다 나아야 되겠습니다. 불구의 자식이라도 당신을 위하여 기쁨으로 생명을 바친다 할진대는, 하늘땅에서 자랑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아옵니다. 그 한 길밖에 없기 때문에 저희를 찾아오셔 가지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내정을 저희들이 살필 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은 언제나 상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아버지 앞에 상습적인 면을 갖추는 불쌍한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적절한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의 마음 가운데에 기억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저희를 들어 기필코 원수를 대한 승리의 기반을 닦아 주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고 또 노력하시는 아버지를 모시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 자리에 서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길은 하나밖에 없는 길이기 때문에 부족한 자식들이 아버님을 모실 수 있는 자리에 서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아버지, 저희들은 그러한 자리를 향하여 가기 위해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몸부림이라도 쳐야 되겠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쉬지 않고 그곳을 향하여 절규하면서 전진, 또 전진하는 모습이라도 가져야 되겠습니다. 불구의 몸이라 할진대는 엎드려서라도 가야 되겠고, 절룩거리면서라도 가야 되겠으며, 그렇게 못 하거든 배밀이를 해서라도 당신을 위하여 가야 할 것이 우리의 처지요 입장인 것을 망각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아버님. 이 땅 위에 불쌍한 것들이 저희들밖에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땅 위에 있는 저희가 불쌍하기 때문에 저희를 대하시는 아버님 또한 불쌍하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진정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가 가는 길을 인도하시는 수고로운 복귀의 수난길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진대, 저희 앞에 서기가 얼마나 끔찍하고 얼마나 부끄럽고 얼마나 수치스럽사옵니까? 때문에, 아버님께서 저희들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약속이라도 해주시면 저희들은 이 길을 다 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원수들 때문에 수치스럽고 치욕스럽게 된 아버님의 입장을 피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마음가짐이라도 가질 줄 아는 아들딸이 돼야 될 것이 저희의 의무요 본분이 아니겠사옵나이까?
오늘, 이 아침에 당신 앞에 찾아온 저희들, 몸 마음을 당신 앞에 또다시 의탁하옵니다. 저희는 남루한 옷을 입은 걸인과 마찬가지요, 부끄러운 상주의 모습과 불구자와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옵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당신을 위하여 효의 도리를 다하려 하고 충의 절개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오니, 이 시간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더우기 이번에 교역장들이 수련받고 임지에 도달하여 오늘 이 아침에 같은 심정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경배드리고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께서 그들의 마음을 붙드시옵고, 그들의 갈 길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아니면 모든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그들이 되게 하시사 이제 책임적인 소행을 감당해 내고, 당신을 위로하는 하늘의 효자 효녀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끔 복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동대원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들은 역사 이래 처음으로 '평화의 십자군'이란 이름을 갖고 이 땅 위에 나타난, 불쌍하다면 불쌍한 무리요, 외롭다면 외로운 무리이옵니다. 당신이 이들을 세계에 내세우셨으니 이들이 가는 길에 있어서, 피를 흘리고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며 가더라도 걸음걸이를 똑바로 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가는 곳곳마다 머무는 곳곳마다 드러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뜻을 다 가지 못하게 될 때에 당신의 자녀들은 불쌍한 자들이 되고 당신의 갈 길은 암담한 길밖에 없음을 아오니, 최후의 이 길을 지키시옵고, 이 무리를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역사적인 수치를 풀 수 있는, 하나의 기념이 되는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오니, 부디 당신이 그들과 같이하여 주시옵고, 천군천사를 동원하시어 그들을 격려하시옵소서. 땅을 당신의 품에 품지 않으면 안 되는 복귀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 원조자가 되도록, 일선에 선 그들을 기억하시고 당신께서 내세운 부끄러움이 없는 정병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8월도 20일이 지났습니다. 8월이 지나면 9월이 올 것입니다. 이해도 절반을 더 넘긴 이때에, 저희들이 과거를 회상해 보고 당신 앞에 청산지어야 할 문제가 많은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저희 자신을 생각해 가지고는 그 문제들의 해결의 여건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불효한 몸이라도 당신의 아들이오니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하며 바쳐 드리고 몽땅 헌제하는 것 이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각오하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1972년도가 당신의 나라를 이루는 데 있어서 역사적인 해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72년도가 당신의 나라에서, 당신의 세계에서, 당신의 역사에서 길이 빛날 수 있는 추억의, 회상의, 찬양의 해가 될 수 있게끔 당신께서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한국을 당신이 맡으시옵소서. 이렇게 불쌍한 이 민족을 찾아오신 아버지여, 이 민족의 장래를 당신의 장중에 묶어 하나로 세우지 못하게 될 때에, 당신은 더더욱 불쌍한 아버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불초한 저희들, 하나의 개인을 중심삼고는 마음과 몸이 갈라져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갈라져 있고, 가정과 가정이 갈라져 있고,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가 갈라져 있고, 하늘과 땅이 갈라져 있고, 사람과 하나님이 갈라져 있는 이 사이에 누가 다리를 놓겠습니까? 개인 개인이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철옹성같이, 너와 내가 하나의 식구를 이룰 수 있는 결합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사온데 그 사명을 누가 하겠습니까? 타락한 인간은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은 영계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의 협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붙드시고 이것을 엉크리고 또 엉크리시어 통일시키시기 전에는 통일될 길이 없사옵니다. 이미 홍수에 떠내려가는 사람과 마찬가지의 운명에 서 있는 저희들의 힘 가지고는 도저히 되지 않기에,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라 부르고 하늘을 향하여 조상이라 부르고 있는 저희들을 불쌍히 보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찾아오실 수 있는 가정이 어디에 있느냐 할 때,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길, 그러한 가정을 찾기 위하여 통일교회는 새로운 의미의 가정을 편성하였습니다. 이는 이 땅 위에 어떠한 민족과 나라가 가기 전에 당신이 먼저 가시지 않고는 민족과 나라가 갈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색다른 가정을 편성한 것도 당신이 통일적인 길을 요구하셨기 때문인 것을 당신은 아실 것이옵니다. 둘이 되었던 것을 하나 만들어 당신만의 것으로 소유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옵니까?
이런 가정들을 모아 종족을 편성했습니다. 그 종족 가운데에는 아벨 종족과 가인 종족이 있는 것을 저희는 압니다. 아벨 종족은 가인 종족을 복귀하지 않고는 부모의 이상권을 이어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의 이상세계를 상속받을 수 없는 것이 원리원칙이기 때문에 저희는 필생의 힘을 다하고 안간힘을 쓰고, 몸부림치면서 가인을 복귀할 수 있는 종족권을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사오니, 이 통일의 무리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축복가정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된 종족을 이룬 다음에는 그것을 중삼삼고 하나의 민족을 편성하고, 아벨적 민족으로서 가인적 민족과 하나되게 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아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의 독립을, 이 나라의 통일을, 이 나라의 제2해방을 이루는 것이 저희들의 소원인 것을 잘 아시는 아버지, 금후의 한국을 당신이 맡아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 누구도 주인이 될 수 없사오니 당신이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는 분명 살아 계시기 때문에 당신이 경륜하시는 뜻대로 될 것을 믿고 알고 나가는 이 불쌍한 무리들의 편에 당신이 서시어서 당신이 요구하는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을 통일시켜야 할, 아시아의 3국, 즉 아담 국가, 해와 국가, 천사장 국가를 규합하여야 할 사명이 저희의 복귀의 노정에 있사온데, 이 중심은 당신이 되셔야 되겠습니다. 그 누구 일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영광을 위하고, 시대적인 영광을 위하고, 우리 후대 후손들의 영광을 위할 뿐만이 아니라 수고해 나오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바라고 있는 이 불쌍한 무리를, 아버지여,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저희들은 그런 길을 걸어왔습니다. 오늘도 그런 길을 가야 되겠고, 그 싸움터를 향하여 달려 나가야 되겠습니다. 내일도 그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원수의 진지를 응시하면서 인내, 또 인내, 또 인내하며 싸움을 거듭해 가는 데 지칠 줄 모르고 효의 도리, 충의 도리를 다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효의 자체요 충의 자체라고 칭찬하실 뿐만 아니라. 만군 만민 앞에, 역사시대의 천천만 성도들 앞에 저희들을 불러 세워 놓으시고 '이는 내 사랑 중의 사랑이요, 내 생명 중의 생명이요. 소망 중의 소망이다'라고 자랑하시고, 당신의 영원한 승리의 위업을 상속시킬 수 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식들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것이 당신의 소원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저희는 마음으로라도 그리 향하고 그리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오랫동안 수난길에서 탕감의 역로를 거쳐 올라온, 남북이 엇갈린 불쌍한 한민족을 이 자리까지 이끌어 나오신 아버지, 앞으로 이 나라를 지도할 수 있는 이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아버님을 숭배할 때에는 흥하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같이하실 때에는 그 민족도 흥할 것을 알고 있사오니. 부디 불쌍한 무리를 버리지 마시옵고 당신이 같이해 주셔야 되겠사옵니다. 당신이 같이하시게 될 때에는 이 나라도 아시아에 있어서 어떠한 민족이 따를 수 없는 위대한 민족이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행동이 문제요, 말이 문제가 아니라 실천이 문제이거늘, 이 길을 향하여 달음질치는 아들딸이 이 아침 여기에 엎드렸으면 복을 빌어 주시옵소서. 마음의 사무침이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의 심정의 줄을 붙안고 아버지를 자극시킬 수 있는 필연적인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남한 각지에 널린 당신의 자녀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하여 주시옵고, 전세계에 널리어서 외로운 길 가운데서 싸우고 있는 무리가 있는 것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원수의 세계 가운데서, 원수의 치하에서 몸부림치며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는 통일의 역군들을 당신이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수고의 한계가 차거들랑 이 땅 위에서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사탄의 권한을 밟으시어, 그들이 영광의 날, 해방의 날, 광명의 새 아침을 찬양할 수 있는 그날을 맞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뻗어 나가는 통일세계의 인연이 개개인의 마음 동산 위에 꽃을 피우고, 생명의 봉화를 드높이 들어 흑암 세상에 자유의 생명의 해방권을 찬양할 수 있는 통일의 길이 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길은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니요, 당신을 위한 길이기 때문에, 당신의 영광이 여기에서 생겨날 수 있게끔 소망을 가져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제 아버지 앞에 엎드린 저희들, 아버지 가슴에 부둥켜 안기어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 가운데 부탁하지 않을 수 없는 부탁을 하면서 내일의 의무와 사명을 명령받는 거룩한 이 아침이 되게 하여 주신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겠사오니, 홀로 남겨두지 마시옵고 찾아와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립니다.
모든 전체가 허락하신 뜻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고, 당신이 기쁨으로 기억하실 수 있는 이 아침이 되기를 바라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 땅에 살고 있는 인류 가운데에 자기가 어떠한 역사의 출발에서부터 어떠한 과정을 거쳐 가지고 어떠한 목적의 곳으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쳐놓고 인류 가운데서 특별히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는, 기독교를 위주로 한 수많은 종교인들을 두고 보더라도, 과연 자기들이 어떻게 출발해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종착점에 도달할 것이냐 하는 것을 확실히 아는 종교인이 많지 않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보다 더 나아가서, 그런 인류를 넘어 정성을 들여 가지고 영적 체험을 하고 있는, 혹은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있는, 혹은 초연한 세계를 친히 느끼며 살고 있는 그러한 특별한 유(類)의 사람들, 다시 말하면 영통하는 사람들, 혹은 진정한 의미의 도의 기준에서 최고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은 과연 영적인 세계의 인연을 갖고 있는, 또 그 체험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어디서부터 출발하였으며 어떠한 과정을 어떻게 거쳐서 어디로 갈 것이냐 하는 것을 아느냐? 그들도 확실히 모르는 것입니다. 영계에 있어서 그들 앞에 분부해 주고 혹은 지시해 주는 그 일은 할지언정, 그것이 어디서 출발하여 어떠한 내용과 어떠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현재의 자기를 통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아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시대에 있어서의 바울을 보나 베드로를 보나 그들은 신앙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본질삼아서 했느냐 하면, 하나님을 본질 삼아 가지고 한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이 세계면 세계, 혹은 그 나라면 나라 앞에 어떠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느냐 하는 문제, 그 문제의 근본적인 유래로부터 그 결과에 대해서 확실히 모르고 허덕이며 움직여 나갔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신령역사로 말미암아 핍박의 와중을 넘어설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개인으로부터 시작해 민족을 거쳐 세계적으로 되지 못하고 국한된 내용으로 남아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 근본 원인이 어떻게 되어서 그런 영적인 현상이 자기들에게 미쳐지고 또한 그것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어떠한 종착점을 향하여 갈 것인지 그 방향을 확실히 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있었던 신령한 역사들이 과정에서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재 기독교의 신학자들은 신령한 역사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하면, 삿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찾아가는 것은 위험하니까, 가 봤자 정상적인 목적을 바라볼 수 없는 결과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에 그나마도 인정하지 못하고 막아 버리는 현대의 신학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신학을 배워 가지고 교회를 인도하고 교회를 책임지고 나가는 사람들이 교역자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들은 교역자들로서 그런 것은 알 바가 아니라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길을 통하여 우리와 관계를 맺을 것이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진리를 통하여 관계를 맺는데, 이때는 말을 하여야만 됩니다. 서로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말을 통하여 사정을 서로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정이란 현재 당대의 사정이 아닙니다. 그런 사정을 가지고는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정이 오래됐으면 오래됐을수록 그 사정을 친구와 더불어 나누고, 그 사정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사정을 친구와 같이 나누어 가지고 그 어려움을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자리가 벌어지게 될 때에 참다운 친구도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자리에서 참다운 인연도 맺어질 것이 아니겠느냐?
서로서로가 자기의 슬픔이라든가. 혹은 고충을 깊은 자리에서 나눌 수 있는 내적 인연이 크면 클수록, 그것이 외적으로 부딪쳐 오는 환난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인 문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적 인연이 보다 보람된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러면 그 외적 환경을 넘는 것은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당한 문제보다도 내적 인연이 약할 때에는 외적 문제를 극복해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같은 운명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동료간, 혹은 관계, 인연을 두고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냐?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오늘날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려면 어떠한 자리에서 관계를 맺으시겠느냐? 피상적인 말을 가지고 관계를 맺으시겠느냐, 진지한 입장에서 뼛골에 사무치는 역사적 내용을 가지고 토로할 수 있는, 사정이 통하고 심정이 가중되는 자리에서 인연을 맺으시겠느냐? 피상적인 말을 가지고 인연을 맺는 것은 피상적인 사건을 넘어설 수 있는 동기는 될는지 모르지만, 생사의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할 수 있는, 자기 일대에 한번밖에 없는 중차대한 문제를 앞에 놓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이 된다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역사라는 것은 개인적인 사건을 수습하기 위한 역사가 아닙니다. 여러분, 구원역사라는 것은 한 사람, 즉 20세가 된 사람이 있으면 20세의 자리에 선 개인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사람을 구하려 할 때에 거기에 역사적인 사명을 가중시켜 놓고 구하려 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이는 어릴지라도 그 어린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될 때에는 역사적으로 그 젊은이를 찾아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 젊은이를 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년 20세가 된 청년의 지난날을 통하여 가지고 그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겠느냐 할 때에 그것은 아닙니다. 20세의 그를 들어서 논하기 전에, 그 자체의 생애 과정, 20년이라는 그 과정을 들어 가지고 논하기 전에 그를 찾아온 유래를 통하여, 다시 말하면 그의 선조를 통하여 논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당년 20세가 된 청년이 자기 조상을 모른다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게 될 때, 그의 조상은 지극히 선한 조상이기 때문에, 그가 20대의 젊은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알고 그를 세워 가지고, 이 땅 위에서 역사시대의 선조들의 선한 공적을 이루어 주기 위한 사명을 분부하시고자 하는데 그를 이해시킬 수 있는 길이 없게 될 때에, 하나님은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또, 그 입장에 선 그 사람은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역사적인 사실을 알 길은 있느냐? 당년 20세의 젊은 사람이 혼자서 아무리 몸부림치더라도 자기 혼자서는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선조들이 선하다는 역사적인 내용을 기록한 책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 책도 없을 때는 그 외에 어떠한 길이 있을 것이냐? 만일에 영계가 있어 가지고 자기 선한 조상이 영계에 가 있다면 영계에 가서 그 선한 조상을 만나는 길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이 천지의 대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그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오늘날 도의 세계에서 자기 입장을 옹호하고 자기 입장을 해명하면서 도의 길을 추구하라고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은 마치 당년 20세 청년이 자기의 갈 길을 가려 가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입니다. 인류가 스스로 처해 있는 입장에서 하나님을 논해 가지고는 종교를 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입장에서 종교를 추구해야 되겠느냐?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으로 그런 길을 기록한 책자라도 있느냐? 기록이라도 있느냐? 있다고 해도 그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거예요. 알 수 없다는 거예요. 자, 그러니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이라도 붙들어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을 붙들기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류 앞에 선의 공적을 나타낸 위인 성현들이 있었거들랑, 그들을 찾아가서 물어 볼 길밖에 없지 않느냐? 또, 만일에 그들을 통하여 가지고 그 일이 해결나지 않거들랑 선한 선조가 영계에 가 있으면 영계에 가 있는 그들과 통하는 길밖에는 역사적인 문제를 해결해 가지고 자기의 입장을 공고화시키고 당당한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이란 없지 않느냐?
이런 관점에서 동양사상을 보게 되면 동양사상은 하늘을 막연히 소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선자(爲善者)는 천(天)이 보지이복(報之以福)하고, 위불선자(爲不善者)는 천(天)이 보지이화(報之以禍)니라'고 했잖아요. 이런 말도, 막연합니다. 선을 행하면 하늘이 복을 베풀어 주고, 악을 행하면 화를 내린다는 거예요. 하늘이 뭐냐? 그러면 동양사상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통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고, 오늘날의 사회에 있어서, 현시점에 있어서 우리가 필요로 하고 원하는 하나님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과 관계맺을 수 있는 내용이 될 수 있느냐? 그건 어렵습니다. 예언은 미래의 관계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미래의 관계점을 확정지어서도 그때가 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예언이 아니냐? 그러면 오늘은 보다 알 수 없는 자리가 아니냐? 그러니 이러한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성인의 도리를 따라가야 할 것이 아니냐? 성인이 이 땅 위에 지금 없거들랑, 그들이 추구한 선의 목적지는 세계의 끝, 영원한 세계였으니 그 소원의 길을 붙들고, 그들이 가던 길과 그들의 방향에 서 가지고 그들의 소원을 보다 긴 역사적 방향에다 세워 놓고, 그것을 그들보다 확실히 붙들고, 하나님한테 묻기 전에, 성인이 영계에 가 있으면 그 영인에게 물어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러한 인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제자들 앞에 그렇게 간곡히 통고하였던 사정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 요한복음 14장을 읽어 보면 알 것입니다. '나는 네 안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도 너희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누구를 통하여서 들을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있는 길이 아닌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왔다 간 예수는 성인 중의 성인이었습니다. 예수가 가야할 방향을 확실히 모르는 제자들이 금후의 갈 길을 어떻게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보았을 때, 비록 그들이 노력한다 해도 현재의 자신들을 중심삼고 노력해 가지고는 천도의 길을 모색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나와 너와 하나될 수 있는 길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비절한 최후의 날을 앞에 놓고 있었던 예수의 심정이 아니었겠느냐? 그것은 당연한 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가더라도 너희와 내가 통할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나니,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 외에는 없다'고 다짐지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예수의 사정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갔다가 너희들이 있을 곳을 준비해 놓고 다시 오겠다'고도 했고, '너희들은 내 갈 길을 알지 못한다'고도 했습니다. 또한 정성들이는 길에 있어서 예수는 제자들이 자기를 그들의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고, 그들의 나라보다 더 사랑하고, 그들의 소원이나 이상보다 더 사랑하고, 자기와 더불어 호흡을 같이하고, 위치는 다르더라도 심정이 일치되고 공감되는 생활권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너와 나는 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다.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에, 남겨진 편지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남겨진 예수의 편지, 즉 남겨진 예수의 말씀의 배후에 숨어 있는 사랑, 알 수 없는 높은 차원의 사랑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그 마음을 중심삼고 너와 나의 하나를 강조했지 그 말을, 그 편지를 놓고 너와 나의 하나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까지 찾아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의 장벽을 놓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날래야 만날 수 없고 통할래야 통할 수 없는 내연을 앞에 놓은 간곡한 처지의 예수, 불쌍한 제자들을 앞에 놓은 예수가 그 제자들을 위로하는 단 하나의 길로서 그때 전한 그 말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이 가는 길에 있어서는 죽음이 그들 앞에 들이닥치고, 그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고 쓰러져야 할 것을 알았던 예수는 '너희는 죽더라도 나를 사랑하는 자리에서 죽으라'는 그 말을 해야 할 터인데, 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듯 말할 수 없는 예수의 사정과 내면적인 인연이 남아진 것이 성서가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가 사랑하는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느냐? 사랑하고 싶은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느냐, 지극히 사랑한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느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성서의 가르침은 사랑하고 싶은 자리에서 말한 것이 아니냐. 사랑을 다 하고 난 후에 '너는 이래라' 하고 명령적인 입장에서 한 말은 성서에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만으로 통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갑니다. 진리는 참된 이치요, 말씀인데 말씀 가지고 통과하는 시대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말씀 통과 시대에 실체는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실체의 사랑은 점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말씀의 약속대로 가게 되면 그는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의 사랑을 점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 가지고 또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통과 과정을 거치는 것보다도 그를 만나 가지고 서로 주고받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나를 사랑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 사랑했느냐? '죽을 수 있는 자리에서 사랑 했다. 또 그런 자리에서 사랑받았다. 서로의 사정을 넘어 맹세하고, 하늘을 찬양하고, 혹은 만세를 부르고 가자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사랑받았다' 할 수 있는 자리를 우리 인간 세계의 그 누구도 맞이한 바가 없지 않느냐?
사랑하는 세 제자마저도, 사랑이 무슨 사랑이예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틀림없이 죽는 거라구요. 틀림없이 죽는 예수라구요. 이미 각오한 예수요, 죽음길을 가기로 결정한 예수였습니다. 그러한 비장한 자리, 생사를 판단짓는 자리에서 세 제자는 잠을 잔 것이 아닙니까? 한 번도 아닙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깨어 기도하라고 두 번 세번씩 권고하던 예수의 그 심정적 통일점을 이 땅 위의 어디서 찾아볼 수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가 최후의 길을 가게 될 때에, '당신이 가는 길은 나도 필생의 소원으로 하고 가겠다'고 따라 나서는 제자가 있었다면, 그가 사랑하고 싶었던 그런 제자가 있었다면, 그리하여 같이 죽을 자리에서 갈라졌더라면, 십자가를 지고 나가던 행로에서, 골고다 산정을 향해 십자가의 형틀을 지고 나가는 그 자리에서 일러주고 싶은 말을 일러주었을 것이 아니냐?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 말하고 싶었던 그 사연이 인류역사상에 나타났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제자들의 사연이 달랐기 때문에, 그 엇갈린 사연으로 말미암아 비장한 죽음길에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하늘의 사연을 인류가 이어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비통한 사실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도의 길이라는 것은 그 자체들로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 환경에 갖추어진 모든 교회의 교권, 교세를 가지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교세를 나타낸 장본인, 즉 교주면 교주를 통하여 보다 차원 높은 내연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갈 길을 잃어버린 이 세계 인류 앞에 가야 할 방향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종교인들 앞에 금후의 방향을 어떻게 가려 줄 것이냐? 이런 문제를 여러분들은 무관심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심각한 입장에서 생각할 때, 이는 세계사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일국의 흥망을 가리기 위한 주권자의 고통도 크거늘, 만국 만세의 해방을 위하여 도의 승리의 터전을 해결짓기 위해 노력하는 그 누가 이 땅 위에 있다면 그는 위대한 분일 것입니다. 반면에 그는 누구보다도 비장하고 누구보다도 처절한 자리에 서서 인생의 절박한 문제를 추구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 자리를 해결지을 때까지 그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 무엇이 이 땅에 나타나기 전에는 인류의 역사적인 연장이 계속될 것이고, 혹은 인류가 소망하는 새로운 이상이 이루어질 수 없는 차제에 우리는 처해 있는 것입니다. 민족 국가뿐만이 아니라 세계를 통하여 할 짓은 이미 다 해봤다 이거예요. 힘으로도 해봤고, 물질만능을 주장하던 물질의 능력을 가지고도 해봤고, 사람의 지혜와 지식을 논하는 그 지식을 최고조로 동원해 가지고 다 해봤지만, 인류의 제2의 해방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한 단계에 우리는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물질을 동원해서 해봤고 사람을 동원해서 해봤는데, 아직까지 해보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사랑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소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사람들은 물질을 원합니다. 그리고 인격을 원합니다. 그 다음에 자기에게 돈이 있고, 학박사가 된 후에는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세계를 자기의 무대로 삼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끼리 세계를 유람하며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 아니겠느냐? 인간들은 이런 단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해 물질을 가지고도 해봤고, 인간의 모든 지혜와 권위를 다 통해서도 해봤지만, 실패의 일로에 봉착했습니다. 이제 한 가지 해볼 문제가 있다면 사랑입니다. 사랑의 역사를 들어 가지고 그저 한번 해볼 수 있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디서부터 생겨날 것이냐?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그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될 것이냐? 지금까지는 인간을 중심삼은 물질을 주장했고, 인간을 중심삼은 인간의 권위를 주장했습니다. 인간끼리의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지금까지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안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여기에 사랑의 길이 있다면, 인간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기원해야 됩니다. 아까 말한 20대의 젊은이 문제에 대한 해결기점은 하나님이 가담하든가, 그 다음에는 그 역사를 아는 선조가 가담하든가 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요, 조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 교리의 골자가 무엇이냐?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자, 인류의 근본 부모로 하자, 심정의 근원된 어버이로 찾자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뭘 하자는 것이냐? 조상을 찾자 이거예요. 여기에서 귀결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에서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부모를 가졌기 때문에, 거짓 부모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하고, 그러한 역사적인 실정을, 세계적인 실정으로 맺어진 이것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중심한 사랑의 기원 밑에서, 하나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상대적 입장의 인류의 참된 부모를 찾자는 거예요. 여기가 통일교회가 가야 할 최후의 목적지요, 이것을 추구해야 할 것이 통일교회 교인들의 심정생활이 아니겠느냐?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오늘날 통일교회는 이 땅 위에 인간을 중심삼고 심정적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우리 조상을 기원으로 한 심정적 역사를 논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심정의 세계를 바라보고 나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과 관계를 맺어야 되겠습니다. 심정의 세계를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기성적인 차원과 달라요. 이것은 혁신적인 차원이요, 보다 고차적인 차원입니다. 거기서부터 관계맺어 출발한 것은 평면적인 정서가 아니라 입체적인 정서적 내용을 갖고 출발한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것이 인류가 귀결지어야 할 최후의 희망봉이요, 가는 길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비참한 모든 역사를 안이와 행복으로 귀결지어 줄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지어도 타당합니다. 그것이 만약에 성사되지 못하게 될 때에는, 아무리 과정이 행복하고, 아무리 과정이 진실되고, 과정에서 아무리 무엇을 가졌다 하더라도, 최후의 종착점이 천지의 근본 되는 하나님과 우리의 문제를 해결지을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하면,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단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님을 사랑하라고 결론지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냐? 어떠한 분으로 왔느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 왔습니다. 그리하여 독생자로서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 받을 수 있는 독생자였어요. 부모의 사랑을 몽땅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외아들이 아녜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역사 가운데에 독생자라는 이름은 위대한 말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독생자인데,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면 독생자라고 했겠어요? 옛날에 인류 시조 아담 해와를 하나님이 직접 지으셨지만, 그들을 다 사랑하시지 못하고 사랑의 품에서 빼앗기지 않았어요? 그러나 절대자의 사랑 가운데에서 절대자의 사랑을 받는 사람을 누가 빼앗아 가겠어요?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타락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미급한 자리에서 사랑의 대상권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하게 된 거라구요. 따라서 여기에 도달한 자리에서, 다시 말하면 타락한 조상이 체휼한 사랑 이상의 사랑을 체휼한 입장에서 왔기 때문에 비로소 사랑을 중심삼고 인류의 소망의 조상으로 등장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를 통하는 길 외에는, 그 예수를 통하는 길 외에는 인간 문제의 해결 방안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버지 앞에 갈 자가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거예요. 우리 통일교회는 그것을 극복하자는 거예요.
내가 어디서 왔느냐 할 때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숭이 새끼라고 하고 있다고요, 원숭이 새끼. 여러분이 원숭이 새끼예요? 오늘날 공산주의 논법에서는 인간이 노동에 의해 가지고 발전함으로 말미암아 인식권이 발전되고 가중된 지식적 터전 위에 서 가지고 인간이 됐다 이러는데…. 그래 원숭이예요? 차원이 다르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통일사상에서 본성론을 강조하고 나오는 거예요. 인간은 본성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종자가 다릅니다.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아이들은 벌써 좋고 나쁜 것을 가릴 수 있는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헌법을 몰라도, 학교를 안 가도 자연히 알게 됩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자신의 출발을 확실히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서부터 출발했는지 사람에서부터 출발했는지 모르고 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라고요. 여러분들은 어머니 아버지가 낳아 주긴 했는데 나자마자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합니다. 나 혼자 나왔는데…. 혼자밖에 없는 입장에서 볼 때, 나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어디에서 나왔을까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역사는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생각할 수 있는 무슨 밑바탕이 없으니 자기 멋대로 생각해서 '이럴 것이다. 이럴 것이다' 귀납적으로 추리해 가지고 '그럴 것 같다' 하는 결론을 내리지, '그렇다' 하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요. 그렇지만 자기가 친히 자라 가지고 산 경험도 있고, 또 사랑한 경험도 있는데 어떤 사람이 '너의 아버지 어머니는 없다'고 하면 그 당장에는 죽어서 없더라도 '야, 이 자식아, 왜 없어? 이러게 마련이라구요. 그놈을 쳐부수고 말지 끄덕끄덕하지 않는다구요, 안 그래요?
자.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기에서 우리 인간들이 해야 할 말은 무슨 말이냐? 오늘 제목과 같은 '미처 몰랐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암중모색하는 자리에서 신음하는 자기 자체를 발견함과 동시에 '내 갈 길은 이렇고 나를 위한 분은 이러한 분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고 난 자리에서,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발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사나이가 있다면, 그 아버지를 어떻게 붙들었겠느냐? 어떤 모습으로 붙들었겠느냐? 그분과 나의 관계를 확실히 알면 알수록 자신은 어떻게 대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러이러한 줄 난 미처 몰랐습니다. 당신이 그러한 아버지이신 것을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고 해야 됩니다.
세상에 타락된 인간 끼리끼리의 사이에도, 부자지간에 서로 갈라졌다가 어떠한 연유로 인해 가지고 장년이 되어서 만나게 되는 것을 여러분은 영화 같은 데에서 봤을 거라구요. 그 아버지가 아들을 찾기 위해 고통을 극복하면서 수고하는 것이 부모된 도리가 아닙니까? 자식은 모르기 때문에 꿈에도 생각하지 않아요.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부모가 수십 년이 넘어 50세가 된 아들을 만났다 하게 되면, 부모가 그 아들을 만남과 동시에 '야, 야, 이 녀석아, 50세가 되도록 내 생각도 한 번 안 했어? 이래요? '야, 너하고 나하고 어디 한번 역사를 말해 보자' 이래요? 어때요? 역사는 다 집어치우는 거라구요. 역사를 초월하게 하는 것이 뭐냐? 심정입니다. 자기 사정을 초월하게 하는 것이 심정입니다. 아버지인 줄 알게 되면 과거야 어쨌든, 체면불구하고 자식은 '아버지' 하는 거예요. 면목이야 있겠으면 있고 말겠으면 말고 그것을 모른다는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 '야 아무개야!' 하며 벼락같이 부둥켜안는 거예요. 그래요, 안 그래요? '야, 야, 야, 조금 스톱, 생각해 보자' 이러겠어요? '야, 너 아무개 녀석아, 어릴 때에 고생한 것을 좀 알고 만나자' 그래요? '내가 너를 찾아 만나기 위해서 눈물을 이렇게 흘렸기 때문에 너도 한번 흘려 보고 만나자' 그래요? 그런 것은 다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일화시키고 귀일화시킬 수 있는 것은 지식이 아니요, 사연이 아니요, 사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그것뿐입니다. 이 힘만이 역사를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가 없을 거예요.
인간이 금력을 가지고 인력을 가지고 다 해봐도 도달해야 할 곳에 아직도 미급입니다. 처절한 절망의 벽에 부딪친 운명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냐? '너하고 나하고 말해 보자' 하는 사연 가지고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하고 인간하고 '자, 토론해 보자. 자, 사연을 이야기해 보자. 진리니 무엇이니 그런 놀이를 해보자' 이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안 돼요. 점프를 해야 됩니다. 대들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그는 틀림없이 내 아버지다'라고 생각하는 것, 이게 문제라구요. 여기서부터 비로소 신(神)과 인간의 인연이 지상의 기대에서 재출발할 수 있지, 그 외에는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논리적 귀결입니다.
자,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을 진정히 알았다면, 이제 '이러한 예를 살피고 아버지를 대하기 위해 찾아온 나 자신이 이제 당신을 알았습니다. 이런 아버지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아들을 만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망하지 않는 것이요, 그 사람 또한 망하지 않는 것이요, 그 사람이 사는 세계는 또한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 알아요? 물론 알고 있을 거예요. 내가 어제 청평수련소에 있었는데, 홍수가 나서 한강에 물이 만수가 되어 흘러가는 거예요. 오늘 여기에 안 오면 안 되겠는데, 어물어물하다간 못 오겠더라구요.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그 물을 헤치고 왔어요. 그것은 모험이라구요. 오면서 보니까 뭐 집이 안 떠내려오나, 뭐 무슨 살림살이, 가구, 뭐 별의별 오만 가지가 다 떠내려오는 거예요.
그 떠내려오는 것들을 볼 때, 저것들은 어디서부터 오느냐? 전부 다 보긴 봐도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구요. '넌 어디 있던 거니?' 하고 물어 볼 수도 없고…. 그 물건들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그저 흘러 떠내려가는 것으로 보지만, 그 자체들의 가치는 천태만상이라구요. 알겠어요? 돼지 새끼가 떠내려가더라도 그 돼지 새끼도 주인에 따라 가지고 가치의 평가가 달라집니다. 아무개집 돼지를 동네의 종이 발길로 찼다가는 돼지를 찬 발길이 그 주인한테 채입니다. 그럴 수 있지요? 아무개집 가정지물, 즉 바가지 하나라도 발길로 찼다가는 그 주인한테 혼나는 거예요. 그 가정지물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것은 주인을 천대하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주인도 그가 자기 휘하에 있으면 '야 이 녀석아' 하며 거꾸로 처박을 것입니다. 이렇듯 그 가치의 내용은 다른 것입니다.
모양이 같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도 천하에 없는, 하나님이 기억하실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겠어요? 여기에서 한국 역사가 기억할 수 있는 위문품이 떠내려올지 모릅니다. 그것은 꼭 무슨 큰 집채가 아니고 이러한 손수건, 종이 짜박지 한 장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 가치는 엮어져 온 배후의 역사에 따라서 천태만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인류역사 앞에, 인류심정역사 앞에 가치적 내용을 지니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오늘날 인류는 그런 역사의 홍수에 떠내려가는 오만 가지의 물건과 마찬가지가 아니냐?
만일에 하나님이 있다면, 그 가치를 아는 주인이 있다면 어떤 것을 건질 것이냐? 종이 짜박지 한 장 줍는 것을 남들이 보게 되면 '저 미친 녀석 보라고, 저 미친 녀석, 건지려면 제일 큰 토막나무 같은 것을 건지지, 저게 무슨 미친 짓이야. 저렇게 수고해 가지고 아이구 종이 짜박지 한장을 건지니, 에이 이 녀석아' 그러겠어요, 안 그러겠어요?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종이 짜박지 한 장이 나라를 팔고 살 수 있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역사를 해방할 수 있는 문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럴 때에는 누가 지혜로와요? 그것은 아는 사람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역사도 그와 마찬가지요, 이 세상 인간도 그와 마찬가지가 아니냐?
오늘날 통일교회가 세상에서 지금까지 규탄받고 나왔지만, 이 통일교회가 어떤 교회냐? 그건 여러분들이 모를 거라구요. 어떤 자리, 어떤 위치에 있었느냐, 어디서부터 출발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통일교회는 종교 가운데에 제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다구요.
제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두고, 그 누구도 모르는 세계까지 발굴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영계가 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지 알아요? 사랑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미국에 있으면 미국에 갔다 올 수 있는 거예요. 순식간에 갔다 오는 거예요. 영계에 가 있어도 순식간에 갔다 올 수 있는 거라구요. 시간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사랑의 역사만 들고 나가면 모든 것을 포괄하고도 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역사는 거기서부터 출발했고, 과정에서는 그곳을 그리며 가고 종착점인 그곳을 표현화시켜 가지고 생활무대에서 이어받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냐? 따라서 그것은 과거에도 있어야 되고, 현재에도 있어야 되고, 미래에도? 없어야 돼요?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있어야 됩니다」 '아, 나는 지금 돈이 많고, 내가 대통령이 됐으니 이것이면 그만이야. 과거에는 내가 사랑을 필요로 했지만 오늘은 사랑이 필요없어. 이제는 여편네, 자식을 다 나눠 주자' 그래요? 돈을 가져 보고, 권력을 가져 보고, 다 해보고는 사랑이 귀한 것을 더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면서도 살면서도 죽으면서도 그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죽을 때에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으면 '야, 죽기 전에 와라' 하고 부르는 거예요. 자식은 부모가 운명할 때 거기에 참석해야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을 보고 죽어야 눈을 감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다고 보고 죽는다고 해서 그 아들딸들이 와서 한바탕 맛있는 갈비짝을 갖다가 대접해요?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천만번 절을 한다고 좋아해요? 아니라구요. 대할 때 눈물을 홀리면서 '엄마, 아빠…'·'잘 있거라…' 하지요. 그런데 유언하기를 '너희는 돈을 잘 벌어서 원수를 갚아라' 한다면 그는 허튼 녀석이라구요. 또 너는 세상의 권력을 잡아라'고 한다면 허튼 녀석이라구요.
진정한 부모라면 '너희는 나보다도 네 아들딸을 사랑해라.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미급했다. 내가 너희에게 보여 준 사랑을 급수로 말한다면 초단급밖에 못 된다. 그러니 너희는 할 수 있으면 십 배 만 배 더 사랑하라'고 한다면 그 이상의 유언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 아버지를(혹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사랑이 부족했다. 내가 이제 임종의 순간에 있어서 한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 아버지(흑은 어머니)를 힘껏 사랑하지 못한 것이 한이니 부디 너희는 이 엄마, 아빠 대신 너희들끼리 힘껏 십 배 만 배 사랑해 다오' 하고 유언을 하는 부모가 있다면 위대한 조상이 되지 않겠느냐? 나는 그것을 찬양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안 그래요? '야 야, 집문서 어디 있어? 집문서' 이래 가지고 '이것 꽉 쥐어라. 네 여편네를 잃어버리고 자식을 잃어버려도 이것만은 잃어버리면 안 된다' 이런다면 이게, 이게…. 그런 조상은 쓰레기통이라구요. 나는 그렇게 보고 있다구요. 그런 조상은 쓰레기통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남겨야 할 유언 중에 최고의 유언이 무엇이냐? 사랑의 전통을 빛내고, 사랑의 현실을 강화하고, 사랑의 미래를 소망으로 자식의 가슴에 불을 질러 놓을 수 있는 자리에서 가는 부모라면, 그 부모는 하나님이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이 그 유언을 따라 산다면, 나라가 추앙할 수 있는 중심존재가 될 것이고, 만국이 찬양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틀렸어요? 자, 이런 입장에서 여러분들 자신을 생각해 보게 될 때,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알았어요?
아까 말했듯이 20대의 젊은 청년 앞에 역사적 섭리를 통한 부모가 있었는데, 그 부모가 일생 동안 있는 정성을 다하고 희생하여, 자기 때문에 죽어간 사실을 몰랐다가 그런 사연을 비로소 알게 될 때에는 뻔뻔스럽던 그 얼굴은 땅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릴 줄 모르던 목석 같은 사나이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질 것이 아니냐? 그 심정을 찾고 돌아서서 산에 있는 무덤을 찾아가는 그 길은 천년사의 인연을 회생시킬 수 있는 부활의 길, 심정부활의 길이 아니겠느냐? 거기에서 무덤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는 그 자리는 천지에 효의 도리와 충신의 도리를 싹틔울 수 있는 거룩한 자리가 아니겠느냐? 안 그래요?
이러한 불쌍한 우리 인류, 이러한 처지에 있던 우리 자신들이 그러한 부모가 있었던 것을 몰랐다가 그것을 알고 난 아침은 새로운 아침이요, 그 아침은 영원히 복된 아침이 아니겠느냐? 눈물을 흘리면 얼마나 흘릴 것이고, 통곡을 하면 얼마나 통곡을 하고, 소리를 지르면 얼마나 소리를 지를 것이냐? '내 울부짖음에 천지여, 화동할지어다. 하늘이여, 여기에 동정할지어다. 역사의 조상이여, 기뻐할지어다' 이러한 최후의 통첩을 하면서 통곡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 아니냐?
여러분은 그런 시간을 가져 봤느냐? 그런 자리에 있어 봤느냐? 나는 그런 자리에 없었고, 그런 것을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 부모는 그런 자리의 연속이요, 그런 비통한 운명의 연속적인 역사과정을 넘어왔을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위대하다고 하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역사를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혁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냐?
그 사랑을 몰랐던 불효막심한 우리 자신들을 다시 한 번 회고하고 다시 한 번 인정하고 나서게 될 때에,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설 것이냐? 그때서 비로소,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 뻔뻔스럽게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가 아니예요. 뼛골이 자지러지듯 머리는 땅에 숨어 들어가고 싶고, 자신이 증기가 되어 날아가고 싶을 만큼 천지에 어디든지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해야 됩니다. 세계를 넘고도 남음이 있을 수 있는 사무친 심정이 격동되고 격발되는 그 자리, 새로운 사랑의 분화구가 지구성에서, 하늘땅에서 솟구쳐 오르는 자리가 있다면, 하나님도, 그분도 그때에 비로소 눈물짓고 '오냐, 내 소원성취다. 오냐, 네 모습이 비록 보기에는 아주 형편없는 모습이고 기가 막히게 처절한 모습이지만, 그 자리가 내 소원의 자리다. 찾아온 보람을 얻는 시간이 아니냐?'고 하실 거예요. 이래 가지고 그런 것을 알고 그런 자리에 서게 될 때에, 하늘이 아무리 모른다 하더라도, 땅이 아무리 모른다 하더라도, 이 경계선을 격파하고 직선으로 달려가 가지고 인간과 하나님이 부딪칠 수 있는 길이 있을 성싶지 않아요? 안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되 이런 자리에서 만나고 싶다고 소원해야 됩니다. 성경을 놓고 소개장을 써 줘 가지고 사랑이 어떻다고 말하고 있는 자리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자리, 나에게는 소개장이 필요 없다고 하는 자리에서 만나야 됩니다. 소개장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왜? 원수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잘못 썼다가는 아들을 함정에 몰아넣게 되어 사자밥을 만들어 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암호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 안타까운 과정에서 신음하는 자신의 필생의 노정을 극복하고 일대일의 입장에서 사랑만을 중심삼아 모든 것을 초월해 가지고, 하나님과 상봉하여 부딪치는 폭발적인 분화구가 자기의 역사상에, 자기 역대노정 위에, 혹은 자기 혈족 가운데에 나타났다면, 그 혈족은 세계에 빛날 수 있는, 빛을 발할 수 있는 위대한 혈족이 될 것이 아니냐? 안 그렇겠어요?
그런 관점에서 그러한 아버지를 중심삼고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 하고 현실의 비참한 것을 느끼고, 현실에 포위되어 사망권을 직시하면서, '이런 해방의 닻줄이 내게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하며 세상의 누구보다도 기쁨을 느껴 가지고 그 부모의 사랑 앞에 혈족을 빛내어 품길 수 있는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수 있을 성싶지 않느냐? 그렇지 않아요? 당연한 결론입니다.
20대 청년이 조상을 만나 그런 사연을, 그런 역사를 전부 다 알게 되더라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인가 실험을 해봅니다. 실험을 해서 한 가지가 맞고, 두 가지가 맞고, 세 가지가 맞고…. 이것이 천만사인데 그것을 다 알려고 하면 일생에 다 마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너 가지만 맞다고 느껴지면 생명을 내놓고 다 옳다고 믿는 것이 좋습니다. 빨리 믿으면 믿을수록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꼬치꼬치, '아 요 잎은 어떻고, 요 가지는 어떻고, 요것은 내 맘에 안 맞는다' 자기 맘에 맞을 게 뭐 있어요? 자기 마음에 맞을 게 뭐예요? 그것은 안 맞게 돼 있다구요. 모든 것이 안 맞는다구요.
처녀가 시집가 가지고 '아이쿠 우리 집하고 맞지 않는구만' 그랬다간 소박맞고 돌아서야 되는 거라구요, 안 그래요? 그게 안 맞아야 시집간 보람이 있지요, 안 맞으니까 딴 분야의 것을 계승받을 수 있다구요. 맞을 때에는 사랑을 몰라요. 안 맞는 자리에서 새로이 사랑을 찾을 수 있다구요. 통일교회 여러분들, 뭐, 통일교회가 안 맞는다고 하지만, 안 맞는다구요. 그거 맞으면 통일교회가 가짜라구요. 안 맞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소망이 있지요. 미치지 못한 자리에서…. 순차적으로 거쳐가야 된다는 거예요.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사실 하나님이 있는데, 부모가 있는데 인간이 타락해서 그 부모를 잃어버리고는 부모를 가진 줄을 몰랐다 이거예요. 이것은 여러분이 심각히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신음하고 몸부림친 그 비례에 해당할 만큼 심각한, 혹은 간절한, 처절한 느낌이 아니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처절한 길을 가 가지고 그 문제를 해결하느냐 하는 경쟁이 도의 세계, 혹은 종교세계의 수난길이더라는 거예요. 맞지요? 가당한 말이라구요. 수난의 도가 차게 될 때 우리 부모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요? 수난의 한계점을 넘어서는 날에 우리는 이상적인 상대를 만날 수 있고, 이상의 나라와 이상의 세계를 볼 수 있으며, 우리 인간이 영원히 영원히 그려도 그릴 수 없던 영원한 사랑의 세계를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극한점에 가서 그것을 바라보고 '아이쿠' 하는 것보다도 '이놈 극한점아 잘 만났다. 너를 밝고 넘어가야 되겠다, 이놈아! 해야 됩니다. 이럴 수 있다면 수난길을 넘어갈 수 있는 소망이 있지만, '아이코' 할 때에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현재 7.4공동성명을 발표하니 대한민국의 삼천만 민족이 '아, 남북 평화의 무드를 조성하는 중에 있다. 이제는 이북에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간다는 말이예요? 역사적으로 볼 때, 자기의 주권을 순순히 옮겨 준 주권자들이 있었어요? 모가지가 잘려 피를 토하면서도 '야야. 이것 내가 분하니 복수해 다오. 저놈을 때려 죽여라' 이런 거예요. 주권을 놓고 이런 싸움의 역사가 뒤넘이치지 않았느냐 이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결국은 통일을 위하는 길에 있어서 공산주의 이상 처절한 내용의 길을 남한 백성들이 가야 됩니다. 그런 한계점을 밟고 넘어선다는 신념이 있으면 남한이 북한을 통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북한이, 남한의 모든 한계적 요건을 참고 넘어서고, 남한 백성들이 못 참고 넘어질 때 북한 앞에 남한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 흡수돼요, 안 흡수돼요? 누가 이겨요? 극한 기준을 극복하는 패가 이겨요, '아이코 난 싫다, 모르겠다'고 하는 패가 이겨요? 물어 볼 것이 없다고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역사의 승패권을 가름하는 최후의 격전장의 용사로 싸우는 데 있어서 앞으로 다가오는 격전, 전쟁 앞에 얼마나 강하고 담대하냐, 얼마나 극복해 내느냐, 생사의 교차로에서도 제2의 결의를 다짐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용사가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구요. 죽음길에서도 또다시 살아서 싸울 수 있는 소망이 있고, 이것을 이루지 못하면 다시 살아서 싸울 것이다 하는 사상이 있으면 공산주의를 흡수할 수 있는 거예요.
공산주의는 유물사상이라구요. 알겠어요? 공산주의는 유물사상입니다. 죽으면 다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통일사상은 내가 뜻을 못 이루게 되면 죽어서라도 가서 싸워야 된다는 거예요. 이런 면에서 한 가지 낫지요. 그런 사상이 아니고는 이길 가망성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지요.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선생님이 뭘 하자고 하면, '아이구 또 뭘 하라고 그러나' 이러지요. 우리 통일교회 무슨 단체의 책임자들, 그 이상의 책임을 느끼면서 가야 됩니다. 가라구, 이놈의 자식들! 변명할 사람이 많겠지만…. '아. 선생님 기다렸습니다. 그 아침이, 그 낮이. 그 저녁이, 그 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라고 하며 몇십 배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남한에 있으면, 북한 사람은 그러지 못하는데 남한 백성이 그러고 있으면 북한을 소화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맞아요, 안 맞아요? 틀려요?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한 것이 뭐냐? 공산당들을 눈앞에 놓고 '누가 노동자 농민을 더 사랑했느냐? 자, 터놓고 이야기해 보자. 백성을 들어 거국적으로 알아 보자' 할 때에 이야기할 재료가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재료를 남겨야 됩니다. 준비를 해야 됩니다. 지금 그것이 필요한 때가 왔다구요.
'3년이 미급하거들랑 10년 세월을 붙들자. 10년이 미급하거들랑 20년을, 내 청춘이 미급하거든 내 장년, 내 생애를 바쳐서 붙들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방안, 통일의 사상적 기틀을 남겨 놓고 가자. 이것이 우리 민족의 소원이 아니냐? 남이야 알아주든 몰라주든 우리는 가자!' 이것이 통일의 길이 아니었습니까? 통일의 사상은 거기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 통일사상이 가는 곳에서는 공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운동을 제시해야 되겠습니다. 현지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어려움도 그 눈을 넓혀 가지고 바라보고 오라고 울부짖을 수 있는 사나이의 무리를 만들어 보자고 하는 것이 통일사상이 아니냐?
그 일을 여기에 있는 문이라는 사람을 중심삼고 시작한다면 패할 가망성이 있지만, 하나님을 동기로 삼고 그런 과정을 거쳐간다면 망할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망하더라도 이 뜻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는 것이 통일교회 문선생의 소신입니다.
우리는 민족이 이렇게 갈라질 줄 미처 몰랐습니다. 이렇게 될 줄은 미처 몰랐지요? 그러다가 이렇게 통일의 운세가 터 오게 될 줄 또한 미처 몰랐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미처 모른 배후에 어떠한 해결방안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처 몰랐다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적용되는 거예요. 이 땅에 왔다가 삼십 당년을 중심삼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필생에 한을 남기고 갔던 예수, 그가 인류의 조상으로 왔던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가 사랑의 남성으로서 사랑하고 싶었던 사랑의 대상. 여성을 사랑해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해보지 못한 것이 얼마나 한이 됐다는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와 가지고 가정을 이루어 종족을 치리하고 나라를 치리하고 세계를 거느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야 할 것인데, 그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게 전부 한이라고요.
6천년 역사시대를 두고 볼 때에, 아담 가정에서 타락된 동기가 무엇인지를 미처 몰랐습니다. 노아가 실패한 동기가 이것인 줄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이 드린 제물 하나가 이렇게 역사적인 한의 거울이 된 줄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모세의 실수가 그렇게 역사적 반역을 일으킨 원한의 터전이 된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세례 요한의 실패를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예수가 간 십자가의 길이 어떻다는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기독교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는 몰랐던 사실을 너무나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는 여러분들이 미처 그것도 모르고 간 그 사람들보다도 못해 가지고 세계 역사시대의 주인이 되고, 심판을 주도할 수 있는 책임자가 될 수 있겠느냐? 어림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보다도 나아야 할 것 아녜요? 아브라함을 대해 가지고 아브라함의 훌륭함을 찬양하는 것보다도 '아브라함이여, 그대는 훌륭했지만 요 부분은 미처 생각지 못했지 않았느냐? 당신은 미처 몰랐지 않았느냐?'고 교시하여야만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여, 당신은 요 점을 미처 모르지 않았느냐?'고 교시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대해서 '당신은 이것을 미처 모르지 않았느냐? 예수님을 대해서 '이러이러한 작전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이렇게 진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앞에 그런 제자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가 그렇게 죽은 거예요. 그렇게 진언할 수 있는 제자를 맞을 수 있어야만 예수가 해원성사 할 수 있는 거예요. 예수 당대에 그런 제자가 있었으면 예수는 성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염려하고 갈 길을 위해 염려하고 진언할 수 있는 제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니, 그 이상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 가지고 십자가에 죽을 것을 예고하니까 베드로가 '선생님이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하자 예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죽게 됐는데 자다가 지금 와서 무슨 수작이야, 이녀석아! 보따리를 이미 싸놓았는데, 이미 결의하고 이미 결심하고, 다 작정한 일인데 이제 와서 그것까지 방해하느냐? 이 겁장이 녀석아' 그런 역사를 모르는 무리나 혹은 동료들간의 동급의 자리에서는 역사를 수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리란 것을 미처 모르지 않았습니까?'라고 교시할 때에, 역사의 부활은 벌어지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실패의 역사가 승리의 역사로 되는 부활권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할 것이냐? 이는 심각한 문제예요.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렇게 될 줄을 여러분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습니다. 미처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르는 민족을 깨우쳐야 될것이 아니냐? 깨우쳐 줘야지, 앞으로 이러다간 망합니다. 망하는 이 민족을 깨우쳐야 됩니다. 지금은 어떤 때냐면 말이예요. 뜻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을 출발한 때와 마찬가지예요. 알겠어요? 지금 때가 그때와 맞먹는다는 거예요.
애급 땅에 살고 있는 60만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에 절름발이 한 사람에게까지도 통고 안 하면 모세가 걸립니다. 모세의 책임이 중대했던 거예요. 그렇게 보면 통일교회가 이 시대적인 사명을 짊어진 무리로서 삼천만 민족 앞에 서서 '나라를 이렇게 사랑해야 산다'는 것을 보여 줘야지 보여 주지 못하면 통일교회의 갈 길은 막혀 버립니다. 만일에 심판하게 되면 통일교회 패들을 먼저 심판해야 됩니다. 그것이 천도라고요. 자기의 아들딸, 자기의 부모, 자기의 혈족이 잘못하면 덮어놓고 남에게만 탓하는 것은 세상 이치지 천도가 아니예요. 천도는 더우기나 역사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지배의 심정적인 내연을 닦은 부자의 인연, 부부의 인연까지도 초월한 자리에서 전통을 중요시하는 기원이 마련돼야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먼저 심판받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패들을 고생시키는 거예요. 만약에 6개월의 형을 받은 사람들에게 1년 동안 고생길에 들여 놓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잘못돼 가지고 당연히 6개월 형을 받은 사람인데 나라를 위해서 1년 동안 고생했다고 한다면, 그런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용서받겠어요, 못 받겠어요? 용서받는 거라구요. 3년 형을 져야 할 사람이 5년 동안 나라를 위해서 죄 값의 몇백 배나 되는 수난길을 가고, 몇백 배 탕감을 하고 고생을 해 나갈 때에 특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길 외에는 없다는 거예요.
이것을 볼 때, 우리 인류가 역사과정에서 얼마나 죄를 지었더냐? 개인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느냐? 가정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느냐? 종족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느냐?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느냐? 그런 사람들이 이제는 세계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 거라구요. 자, 이 사람들을 한꺼번에 용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세계에 없는 고생을 시키는 비법밖에 없습니다. 알겠어요?
성경을 보면 종말에는 7년 대환란이 온다고 했는데, 그런 관점에서 그 대환란이라는 말이 좋아요, 나빠요? 고마운 말씀, 응당한 말씀, 타당한 말씀, 거룩한 말씀이예요. 7년 대환란이 오면 자식이 있으면 자식을 버리고 나가야 되고, 아내가 있으면 아내를 버리고 나가야 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 환란 때에 피난 가면서 '아이고 내 아들아 내 딸아!' 이러는 녀석들은 피난 가다 한꺼번에 다 죽어 버린다구요.
그럴 때에는 할수없으니 네 패로 나누어 가지고 가라구요. 장가간 아들딸이 있고 식구가 열 사람 이상이 되면 네 패로 나누어 가지고 어머니한테 갈 수 있는 아들딸을 묶어 주고, 형님한테 딸을 묶어 주고, 누나한테 아들을 묶어 주고, 아버지한테…. 그래야 종자를 남길 수 있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이런 생각을 가지면 그 가정은 피난민 가운데서 그 가정은 위대한 가정으로 남아질 것입니다. 미래의 국난을 방지하기 위한 거룩한 사상을 지닌, 사악과 분립할 수 있는 인연에는 미래의 소망이 깃들지 않겠어요? 그 슬픈 과정에서 남아진 것은 자기들의, 현재의 집안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후손과 혈족을 위한 것이다 할 때는 다르다구요. 안 그래요? 그저 '아이고 떨어지면 죽는다. 아이고 어서 와라' 이러다가 죽게 되면 한꺼번에 몽땅 망해 버립니다. 비상시 피난길에서는 서로 서로 갈라져서 보따리를 짊어지고 동으로 내빼고 서로 내빼는 것이 사는 길이예요. 그렇게 죽음길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은 사람이 그래도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안 그래요?
통일교회 믿자고 해 가지고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우리 여편네, 남편이 같이 가야지, 우리 아들딸과 같이 가야지…' 이렇게 같이 가려다간 옥살 박살 전부 다 죽게 되는 거예요. 생각하기를 뭐 설마 그럴 수야 있을라구. 옛날에 안 그랬는데 오늘이라고 그럴 수 있나' 하겠지만 지금 우리는 최후의 작전을 하고 있는 거라구요, 최후 작전을…. 죽기 아니면 살기 내기라구요. 망하기 아니면 흥하기 내기예요. 방법은 둘밖에 없습니다. 안 하려면 아예 그만두던가 하려면 악착같이 하든가 해야 돼요. 알겠어요? 하려면 세상 사람보다 악착같이 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뭐예요? 너, 어떻게 해야 되겠어? 어떻게 해야 돼? 통일교회를 믿겠으면 악착같이 대들고 그만두려거든 보따리를 싸가지고 가라 이거예요. 통일교회 책임자로서 이런 말을 해서 안됐지만 심정이 다르다구요. 방해는 되지 않아야 됩니다. 방해자는 되지 말아야 돼요. 지금도 방해자가 많다 이거예요. 애국 투사가 세계에 홀로 남더라도 그에게 민족정기가 올바로 잡혀 있을 때에는 거기서부터 새로운 건국이념이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하고 독한 말 같지만, 섭섭해요? 진짜 그래야 되겠어요?「예」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길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이상 먼저 가야 돼요. 그럴 때가 우리 앞에 와요. 누가 북한에 갈 것이냐? 북한에 들어가서 전도 기반을 닦아야 되겠다구요. 지금 동구(東歐)에서 통일교회 식구들이 지하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고요. 그런 문제를 중심삼고 선생님이 밀명을 하고 돌아왔어도 그런 이야기를 안 해요. 여러분, 통일교회가 현재 자유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예요. 여러분이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싸움터가 세계 전선으로 확대되어 있습니다. 1972년도의 표어가 '통일전선수호' 아녜요? 그렇지요?「예」
통일전선수호 하자는 것이 임자네들 잘살자고 하는 거예요? 이 쌍것들! 새끼를 끼고 돼지처럼 잘살자는 거야? 하기야 그것도 해야지. 그렇지만 나라를 찾고 태평세월을 맞이할 때까지는 이를 악물고…. 때가 되면 선두에 서서 피를 흘리고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 더 잘살 것입니다. 세상 일이 그렇게 되는 게 원리라구요. 오래됐다는 사람, 명령하는 사람, 탈쓰고 있는 사람, 나는 보기 싫다구요. 저거 저러다 어떻게 망하려고…. 그가 망하지 않으면 내가 망하는 거예요. 내가 그릇된 입장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내가 망할 것이고, 내가 올바른 자리에서 그렇게 생각하면 그가 망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무정한 길이 이 길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무정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무정하더라구요. 그저 바삭바삭 죽게 될 때까지 돌보지 않는 거라구요. 그러다가 아이고, 죽는 그 순간에 가서, 죽을 자리에서도 첨단에, 맨 꼭대기에 올라가서, 아이고, 나 죽는다고 하는 거기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느냐, '아버지' 하느냐 하는 것을 문제삼는 것입니다. 예수도 그랬지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랬지요? 그 자리라고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했지마는 그다음에 '다 이루었다'라고 했지요? 버리는 최고 절정의 자리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인간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버렸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염려하여 보러 오게 될 때에 '아이고, 엄마 아빠' 하고 붙들어야 부모가 '오냐, 얘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부모인 하나님의 위신도 서는 것이요, 자식도 체면을 갖출 것이 아니냐? 그 자리까지 가야 되는 것입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사망선이 벌어져서 그 사망선을 출발할 때 눈물을 흘리며 비참한 몰골로 나왔기 때문에, 생명선을 넘기 위해서는 타락하던 때 이상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넘어가야 빛나는 새 생명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거 다 이론적이라구요.
통일교회 패들을 모조리 잡아다 이북 귀신 만들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이라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기분 나쁜 사람은 통일교회에 안 나와도 돼요. 한국 사람이 못 하게 되면 일본 사람을 잡아다가 할 것이고, 일본 사람이 못 하게 되면 서양 사람을 잡아다가 할 것입니다. 문선생이라는 사람은 지독한 사람이라구요. 질기다면 황소 힘줄보다 더 질기다구요. 시시하게 몇 달 동안 통일교회에 드나들다가, 뭐 되고 안 되고 그런 수작하는 사람은 '푸우-' 어서 물러가라 이거예요. 그런 사람은 개, 돼지 새끼만큼도 생각지 않는다고. 그런 녀석들과 나는 종자가 다르다 이거야. 몇 년이나 가다가 지쳐서 그래? 나는 종자가 다르다 이거야.
이렇게 심각한 것이 통일교회 문선생이예요. 여러분도 역시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 하는 입장과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금후에 대한민국의 갈 길은 어떻게 될 것이냐? 망하고 나서, '아이고 이럴 줄은 몰랐다. 이럴 줄은 몰랐다' 그런 사정을 봐주면 한이 없어요. 보라구요. 이번에 일본 수상 선거에서 후꾸다를 보라구요. 후꾸다는 자신을 갖고 나갔다구요. 그러다가 결과를 보고는 '어이쿠,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미처 몰랐다'고 했지요. 그게 아니라 준비 부족이요, 정성 부족이요, 활동 부족이라고 해야지요.
자. 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오늘은 8월 20일, 내일은 8월 21일, 우리는 8월 15일을 통일의 날로 설정했어요. 우리는 이 민족을 통일해야 되겠습니다. 남북통일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려야 되겠습니다. 내가 삼팔선을 넘어오면서 다리를 걸어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통일을 해야겠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못 하고 죽게 되는 날에는 삼팔선 완충지대에 무덤을 남기고 가야 되겠다'고 한 거예요. 그런 생각을 갖고 지금 싸워 나가고 있는 선생님인 것을 여러분은 미처 몰랐을 것이라구요. 내가 김일성이 졸때기한테 고문을 받았는데 그 사람의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아직까지 이것은 이야기를 안 했지만, 잊어버리지 않고 '어느 한 날 너를 못 만나면 네 아들딸을 만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고 다짐한 거예요, 안 죽겠다 이거예요. '김일성이 너 두고보자. 너와 내가 정면으로 충돌해 가지고 일대일 담판을 지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날을 위해 준비하고 나가는 거예요. 이거 바쁘다구요.
이번에 내가 3차로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이 이놈의 공산당, 빨리도 서둘러 가지고 세계를 망칠 수 있는 단계에 왔구나 하는 것입니다. 딱 골리앗 앞에 선 다윗과 같은 기분이더라구요. 그러니 이제 하나님밖에는 붙들 것이 없다구요. 엘리야가 기도하면서 '나만 남았나이다' 했지요. 그렇게 낙망하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이 '바로에게 굴하지 않는 7천의 무리가 있다'고 통고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제 이 세상에 나만 남았나이다' 할 때에 이 땅 위에 바로에게 굴하지 않은 7천의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어요. 대한민국내에 통일교회 교인들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준비한 7천의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에 그들이 관계를 맺자고 자꾸 연락하고 있어요.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이 저럴 줄 미처 몰랐다고 할 수 있는 그때가 언제 올지 몰라요. '그럴 줄은 몰랐다. 이럴 줄은 몰랐다' 할 그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실 줄을 몰랐다. 그러실 줄 미처 몰랐다'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는 여러분의 일상생활을 중심삼고 생애노정에, 복귀섭리의 운명을 중심삼은 심정적 세계에 그렇게 엉클어져 있는 것을 알고, 여러분이 이 아침에, 이 8월이 지나가기 전에 새로운 결심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밤이나 낮이나 쉴 사이가 없습니다. 알겠어요? 「예」
이렇게 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나라에 소망을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거들랑 여러분의 아들딸 앞에…. 만일에 공산당한테 못 이겨 가지고 일보 양보하게 되더라도 우리 아들딸들은 이렇지 않아야 된다고…. 아들딸 앞에, 그 피맑은 10대의 소년 소녀에게 '우리는 이 치하에서 죽어 가지만 너희는 10년 후 스물 몇 살이 되거들랑 이런 치열한 공산권에 들어가더라도 이겨야 된다'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유언이라도 남겨야 할 것이 아니냐? 심각한 때라구요. 오늘 먹는 밥이 어제의 밥을 계승한 밥이 아니라고요.
이러한 입장에서 모든 극한 어려움을 책임지고 민족을 수호함-이것은 통일전선 수호예요-과 동시에 민족 앞에 가는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저렇게 저와 같은 무리가 되어 저와 같은 사상을 갖고 저와 같은 행동을 하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남북을 통일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증거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때가 되면 기성교회 교인들은 '통일교회가 저렇게 될 줄은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할 거예요. 역사적으로 싸우다 간 영계의 영인들이 보고는, '통일교회가 저렇게 될 줄 미처 몰랐습니다' 할 거예요. 말할 것도 없이 그렇게 된다고요.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탄식권내에서 '미처 몰랐습니다' 하는 것보다도 소망권내에서 눈물을 흘리든, 뭘 하든, 죽든, 소망을 붙들고 '미처 몰랐습니다' 하며 감사할 수 있는 밑받침을 가지고 여러분이 죽든가 살든가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늘편에 설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고 과거를 반성하면서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를 재차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사랑하는 아버님! 그렇게 수고로왔던 당신의 뜻이, 내가 있기 전부터 있었던 그 뜻이 이러한 결과가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몰리는 자리에서 낙망하고 절망하는 내가 안 되겠다고 몸부림쳐 나왔습니다. 알고 보면 감사밖에 할 수 없는 오늘을 가진 것을 먼저 아버지 앞에 감사하옵니다.
통일교회가 이 민족 앞에 지탄을 받고, 기성교회 앞에 비바람 몰아치는 몰림을 당할 때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청산될 줄 알았지 오늘날 이와 같은 기준이 남을 줄은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아시고 부족한 것들을 수습하시고 권고하시기에 많은 애달픈 사정을 지닌 채 세월을 보내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제가 당신을 모신 것이 부끄럽습니다.
아버지께서 이 민족의 슬픔을 맡을 수 있었고, 아버지께서 이 민족의 수난길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께서 얼마나 저희를 사랑하는 줄을 알겠사옵니다. 아버님이여, 오늘날 저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계시거든, 저희가 이 민족을 위하여 참고 나오신 당신과 같은 인연 가운데에서 몸부림쳤사오니, 이 민족을 사랑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이 자리에 있는 아들의 마음이요, 통일의 무리의 마음들인 것을 아시는 아버지시여, 당신은 저희 곁을 떠나지 마시옵소서. 그러나 저희는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당신에게 아픈 마음이 있거든 그 아픈 마음을 대신 책임지는 데 있어서는 누구한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것이 저희 통일의 무리인 것을 이 시간 믿고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50평생 이 길을 줄달음쳐 나왔습니다. 이제 반세기를 내리막길을 향하여 60으로 70으로 80으로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육을 갖고 있는 연고로 때로는 옛날과 다른 육신의 피곤함을 느끼옵니다. 그럴 적마다 당신 앞에 충성을 다하지 못한 오늘, 오늘을 부끄러이 생각하는 이 마음을 당신은 아시옵니다. 지금도 가야 되겠습니다. 내일도 가야 되겠습니다. 그 누구가 환영하는 것을 바라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안이(安易)를 위하여, 당신이 소망하시는 그 터전을 향하여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비참한 줄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그러한 자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것이 당신으로 연유된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 시조로 연유되었기 때문에, 원한의 구렁텅이가 우리 인류 시조의 죄악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역사는 이것을 밟고 넘어서기 위한 당신의 소모전쟁이요, 탕감의 역사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오늘에야 이것을 알고 난 저희들, 굶는 것이 문제가 아니요, 매맞는 것이 문제가 아니요. 찢기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이 자식을 위해 울어 줄 수 있고, 사랑의 마음을 갖고 아무개라고 불러 줄 수 있는 그 자리를 남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버님, 아버님, 통일교회를 사랑하시는 아버님, 통일교회를 사랑하시는 것같이 세계를 사랑하시옵소서. 세계를 바라고 있는 아버님, 통일교회는 세계를 위한 소망을 가졌사오니, 드높은 소망을 가하시어서 세계를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단 한 번만이라도 세계를 위할 수 있는 기회를 이들 앞에 허락하시옵소서. 만군 만민이 쌍수를 들어 '하나님은 그렇다'고 하며 당신의 영광을 찬양할 그때까지 망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끝까지 참고 남아야 되겠사옵니다. 자꾸만 다짐해 가야 되겠습니다.
이 아침, 과거를 다시 한 번 반성하고, 현재의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출 수가 없어 아버지 앞에서, 이 자리에서 뛰어 나가면서 '나의 본을 받지 말고 아버지 앞에 미치고 갈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소망된 길이 열릴 것이고, 그 사람에게는 아버님의 심정이 동정의 터전으로 바쳐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마음이 이 시간 다시 한 번 일어나도록, 당신이 찾아와 주시옵고, 저희들의 본성의 마음의 문을 여시어서 불꽃같은 눈으로 살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통일의 깃발 아래서 이곳을 바라보면서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는 그들에게 사모의 심정과 흠모의 심정이 무한히 무한히 뻗어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그리움의 사다리를 당신의 마음, 당신의 심정 복판에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지상의 족속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달과 이해, 그리고 70년대가 당신의 보호의 손길에서 빠져 나가는 일이 없기를, 아버지여, 부탁하옵니다. 당신의 권한과 당신의 뜻을 생각하여 그리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옵나이다. 남북의 모든 사정을 아버지께서 살피시옵소서. 제가 그리워하고 가 보고 싶어하는 곳이 있는 것도 당신은 알고 계시옵니다. 그러나 책임 다하지 못할 때 그것이 찾아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초조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일면 느꼈기 때문에, 이제부터 저희들은 불철주야 몸부림이라도 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고이고이 소원의 한 날, 해방의 한 날, 영광의 한 날, 승리의 한 날을 맞으시사, 온 피조세계의 환호와 더불어 당신의 희열과 만족과 행복이 인간을 통하여 어우러진 천주가 되게 하여 주시옵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오니, 아버지시여, 협조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날에서도 승리의 터전을 예상하면서, 다가오는 극복의 행각을 도피하는 졸자가 되지 말고 전진에 가중된 진격을 명령할 줄 아는 하늘의 정의의 용사들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당신의 소신에 맡기오니 허락하실 수 있는 은사대로 처리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올 때에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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