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지방에서 많은 수고를 하고서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모이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아주 더운 고개는 이제 넘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저녁에 여기 왔으니 앞으로 5일 동안 말씀을 들으면서 앞으로 새로운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해야 할 일들을 염두에 두고 재차 결의하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어찌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잠시 얘기를 할까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지금까지 활동해 나온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또, 선생님 자신을 두고 봐도, 선생님에게도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이끌고 나온 역사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에게도 역시 그와 같은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크게 하늘을 중심삼고도 그런 역사가 있고 땅을 대표해서 사람에게도 그러한 역사적 인연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작은 것은 큰 것, 보다 큰 것을 중심삼고 흡수되어 보다 큰 가치를 드러내야 된다는 것이 우리의 원리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의 역사를 두고 보면, 여기에는 선생님의 역사가 가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통일교회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여기에 여러분의 역사가 첨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역사를 중심삼고 볼 때, 지상에 있어서는 선생님의 역사와 여러분의 역사가 첨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중심삼고 보게 된다면, 여기에 하나님의 전체의 역사가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참의 역사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되느냐? 통일교회가 지상에 나타나 가지고 이룬 그 역사만 가지고는 참의 역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기 때문에 참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세워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을 대표한 우리들은 참의 중심인 하나님을 따라 어떻게 해서 하늘의 전통을 계승하느냐 하는 내연을 결정지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참의 역사를 상속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참의 역사를 이어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통적인 역사를 이어받아야 된다는 말로 귀결됩니다.
복귀섭리라는 것을 중심삼고 볼 때, 이것은 현재를 중심삼고 해결의 기점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 해결의 동기는 역사 전 시대와 인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시조가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한 그 고비를 다시 넘기 위해서 복귀역사를 거듭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고빗길을 넘기 위한 터전은 하늘이 아니고, 바로 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사람을 위주해 가지고 그 역사(役事)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중심삼고 그 역사를 하는 데 있어서는, 이것이 타락한 아담 해와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부모의 기준을 완성해야 됩니다. 그 부모를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뜻, 타락되지 않은 가치적 기준을 어떻게 전세계에 횡적으로 적응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전통적 역사를 지상에 옮겨 놓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락한 부모 이상의 부모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이후에 타락한 후손들이 나와 가지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의 세계를 번창시켜 놓았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은 후손들이 나와 가지고 번창된 악의 세계를 제거시켜야 됩니다. 이런 가중된 사명이 오늘날 복귀섭리를 담당한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개개인에게는 '어찌하십니까', '어찌하오리까'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각자 주장할 수 있는 인격을 다 갖고 있을 것입니다. 또, 각자의 소견을 다 갖고 있을 것입니다. 또, 자기 나름의 역사를 지내 왔고 자기 나름의 생활관을 가지고 생활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를 중심삼고 지내 온 그 역사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역사가 되었느냐, 또 현재 살고 있는 생활 환경이 이 지상섭리의 터전 위에서 복귀섭리의 전체의 뜻을 이루고 탕감시킬 수 있는 기준이 되어 있는냐 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은 개인이로되, 부모의 뜻을 이어받은 개인인 것입니다. 여기서 그 부모는 역사적인 선한 기준을 소망하고 있는 부모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 역사적인 소원을 성취한 부모의 후손의 자리에 선 우리 각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과연 그런 사람들이 있느냐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을 중심삼고 보면,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십년 역사를 지낸 사람도 있고, 혹은 그 이외에 몇 년의 역사를 지낸 사람도 있고 전부 다 그럴 것입니다. 그 역사적인 신앙생활에 있어서, 과연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전통적 기준에 일치될 수 있는 역사를 지내 왔던가 하는 문제를 두고 면밀히 검토하고 비판하면, 거기에는 엇갈린 역사적 과거를 지내 왔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현재 살아가고 있는, 생활하고 있는 나 자신을 두고 이렇게 승리해야 된다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전통적 기준을 중심삼고 냉정히 비판해 보게 되면 그 기준에 일치될 수 있는 생활관을 지니고 살아 나온 식구들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대해 가지고 바라는 입장과 오늘날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대해 가지고 바라는 입장이 엇갈리지 않을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렇게 가야 된다'는 전통을 갖고 있는 반면 오늘날 인간들은 이 세속적인 습관과 자기 나름의 소원과 자기 개체를 중심삼은 욕망을 중심삼고 가고자 합니다. 이렇게 엇갈리고 있는데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는 비례되는 하나님의 고충이 개재되는 것이요, 탕감적인 내용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러한 내용의 한 면을 어디에다 축소시킬 수 있을 것이냐? 예수와 하나님 사이에다 축소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쳐놓고, 우리 자신들은 하나님의 전통을 이어받을 수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예외로 하고, 하나님과 예수를 중심삼고 볼 때에, 즉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모든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대표자로서의 예수, 그 예수와 하나님 사이를 축소시켜 놓고 볼 때에, 하나님의 소원과 예수의 소원도 엇갈린 것을 우리는 엿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문제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던 예수의 기도의 표제가 무엇이냐 하면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입니다. 내 뜻과 아버지의 뜻, 여기서 뜻이 양면의 내용을 갖추게 됐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예수 자신을 두고 보면, 그는 뜻을 위해 온 사람입니다. 뜻을 중심삼고 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통적인 모든 역사적인 인연을 이어받고, 그 인연을 따라 현시대에 횡적 관계의 세계를 형성하여야 할, 의당 뜻 이외의 자리에는 있을 수 없는 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내 뜻'이라는 말을 하게 되었느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거기에는 반드시 상충의 한 내용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가 선 자리는 어떤 자리냐? 개인을 대표한 자리가 아닙니다. 이 땅 위에 보내진 예수만으로 선 자리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민족을 대표한 자리요, 국가를 대표한 자리입니다. 유대교단의 전체 제사장들이 그 직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다할 수 있는, 다 감당할 수 있는 자리에 예수는 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내정을 아는 예수는 일대 고충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부딪쳤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길을 따라가야 되겠는데, 그 길이 이 인간세계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수습해 가지고 뜻을 이루어야 할 자신의 입장을 부정하고 나서면 모르지만, 그것을 부정한다면 소망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 부딪친 예수는 인간을 대표한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내 뜻'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처지와 형편을 너무나 잘 아는 예수는 인간의 사정을 알아주고 싶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고차적인 뜻의 방향과 180도의 차이가 있는 반대 방향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과 방향을 같이하고 싶은 예수는, 할 수만 있으면 그것을 조정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세상을 대표한 책임자로서 그런 마음을 안 가질 수 없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최후에 가서는, 조정도 절충도 통할 수 없는 완전한 뜻의 고빗길에서는, 용납도 절충도 타협도 성립될 수 없는 최후의 순간에 가서는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거기서는 내 뜻을 부정하고 아버지의 뜻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 예수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망해 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뒤에 놓고, 지금까지 4천년의 하나님의 수고의 역사가 일조일석에 무너지게 하는 유대교를 뒤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가며 담판 기도하던 예수의 마음은 우선 인간편의 사정을 다 들어주고 싶고, 인간을 대표해 가지고 수습할 수 있는 방안을 다 가지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하나 하나 내용을 들어 기도하던 그 시간은 자기 선조들이 잘못한 역사를 들어 가지고 하나님 앞에 통고하는 시간이요, 또 현재의 이스라엘 민족이 담당한 책임을 못 하는 자리를 바라보며 그 잘못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그 내정을 살피고 심히 아픔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통고하는 시간이 아니었겠느냐. 이렇게 된 모든 사정을 알기에 그는 그 뜻을 대해 주고 싶고 알아주고 싶었지만 최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결정권을 바라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을 찾아왔던 예수는 메시아로서, 만국과 만민을 구해야 할 사명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에 서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담판적인 진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가 얼마나 심각한 자리였겠습니까?
그 자리에 섰던 예수에게는 나는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나는 어찌해야 되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4천년 동안 수고해 찾으신 유대교,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저끄러진 자리에 서 가지고 중심적인 사명을 감당하여야 할 책임을 지고 왔지만 이제 책임할 수 없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나는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 마음세계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참기 어려운 고충 가운데 신음하였던 예수인 것을 우리는 발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내정을 붙안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그 사연이 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방안을 모색하고 싶은 마음이 두터웠던 예수는 하나님 앞에‘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던 거예요. 그 자리가 얼마나 괴로운 자리요, 얼마나 심각한 자리였겠느냐? 그러나 그것을 그 당시의 제자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간 위치에 있었던 메시아로서 '나는 어찌합니까?'라고 한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에, ‘나 자신을 살피지 마옵소서. 나보다 당신은 어찌하십니까? ’라고 한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예수는 자기 사정을 논의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입장을 제쳐 두고 '당신의 사정을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내가 온 보람이요, 나를 보내신 당신의 사정이 아니겠느냐' 하는 입장에서 서슴지 않고 자기 일체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주장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심정적 내연이 하나님과 예수의 심정세계에 연결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예수가 '나는 망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로 다시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건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재차 결의하도록 자극시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 다시 말하면, 죽는 예수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새로운 결의를 하도록 자극시킨 동기가 거기서부터 생겨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심각한 자리에서 자신의 문제 보다도 ‘하나님은 어찌하십니까?’하는 그러한 내정에 부딪쳐 가지고 자기 일체를 부정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이 지상에서 제2차로 승리적 터전이 된 기독교 역사의 새로운 출발의 기원을 이루어 놓을 수 있었던 동기가 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당시의 예수 자신의 마음에 어떠한 것이 스쳐 갔을 것이냐? 자기 가정에 대한 문제도 스쳐갔을 것이고, 자기 종족에 대한 문제도 스쳐갔을 것이고, 자기 민족에 대한 문제, 혹은 자기 국가에 대한 문제도 스쳐갔을 것이 아니냐. 내 종족은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문제도 담판 기도의 내용이 되었을 것이요, 내 민족이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문제도 담판 기도의 내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종족이 망하더라도 민족이 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아는 예수에게는 자기 종족을 다 쓸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민족을 세우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민족을 희생시키더라도 세계를 남겨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을 아는 예수에게 자기 민족이 망하더라도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남겨 놓아야 되겠다는 절규의 마음이 자기의 죽음보다 강했기 때문에, 죽은 예수는 부활의 역사를 입어 자기가 태어난 이스라엘 나라를 넘어서 가지고 세계가 발전할 수 있는 동기를 가려 놓았을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의 사명은 어떠한 것이냐? 이것은 단적으로 통일교회의 문 아무개를 중심삼은, 그러한 역사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새로운 무슨 주의 사상을 중심삼은 운동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계시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냐. 창조주이신 하나님, 창세 이후 창조물을 지어 나가는 창조과정에 있어서의 하나님, 창조이상을 중심삼고 소원성취의 일념을 가지고 어려운 문제들을 극복하시며 창조해 나오시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소망의 일념을 가지고 모든 수고의 노정, 창조의 노정도 수고로 생각지 않으시고 소망의 터전으로 생각해 싸워 나오던 전부가 아담 해와로 말미암아 결실되었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아담 해와는 이것을 완전히 파탄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중심삼고, 심정을 중심삼고 상처받은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하고 '당신의 심정이 어떻습니까?' 하던 예수의 심정을 생각해 보세요. 그것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 것이냐? 이 둘로 말미암아 천지에 행복의 터전이 벌어지고 그야말로 창조주로서 바라는 이상의 실현이 가능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전체가 파탄되어 가는 것을 직시하던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사랑하는 자식들을 키워 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알겠지만, 자식들의 장래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 자식은 틀림없이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오늘보다 영광된 자리가 확보되어 있다. 보증되어 있다. 틀림없이 결정적이다' 해 가지고 나가는데 그 결정적인 코스를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것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면 어떠하겠느냐? 그러한 장면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지금까지 소원하였던 그 소원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창조이상으로 세웠던 그것이 하나님에게 희망의 요건이요 행복을 초래할 수 있는 자극적인 요인이 아니라, 반대로 탄식의 요인으로 화해 가지고 하나님의 가슴을 향해 쏴 버리는 입장에 서게 될 때에, 그 하나님은 어떠하셨겠습니까? 이건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는 그 현장을 직시하던 하나님은 어떠하셨겠습니까? 어떠하셨겠어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잠깐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도, 어떤 사람에게 슬픈 일이 있게 될 때에, 그의 슬픔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는, 슬픈 그 사람보다도 더 슬픈 일을 가지고 있든가 더 사랑하든가, 더 높은 자리의 인연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어 가지고는 그 슬픈 사연을 완전히 제거시켜 버리고 기뻐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혹은 부부생활에 있어서의 감정 문제를 두고 볼 때도, 그 부부 싸움은 위로해 줄 자가 없습니다. 막을 자가 없다구요. 그 이상의 심정적 내용을 지니지 않고는 간섭할 수 없는 거라구요. 그렇지만 부부의 사랑보다도 높은 사랑을 하는,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와서 자식들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논의하게 될 때에는, 그들은 간섭을 받게 되는 거라구요. 슬펐던 일을 넘어 기쁠 수 있는, 더 사랑적인 내용을 가지고, 더 가치적인 내용을 가지고 접근하여 기뻐하라고 하면 위로가 되지만, 그 이하의 것 가지고는 위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우리 인간의 감정이 아니냐.
이렇게 볼 때에, 타락 직후에 타락한 아담 해와를 직시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있느냐? 절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아담 해와보다 더 사랑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 아담 해와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을 위로할 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 아담 해와 이상의 심정적 내연을 갖고 나타난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이 나와 가지고야 역사적으로 상처를 받은, 타락 직후의 아담 해와를 직시하고 슬퍼하시던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위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기도할 때에,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렇게 거리를 두고 아뢴 것은 무엇이냐? 타락한 아담의 역사, 그 역사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겠다는 결의를 예수가 최후로 표시한 것이 아니냐. 심정적 문제에 있어서 자기를 생각해 가지고 타락했기 때문에, 자기를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냐. 자기의 환경적 요건 전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냐.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에, 아담보다 낫다는 거예요. 아담보다 낫다는 거예요. 아담보다 나을 수 있는 심정의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의 내연을 찾아 나섰던 예수의 모습이 아니냐. 그가 거기서 울면서 농조로 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눈물과 피땀을 흘리면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쫓겨날 때의 비통함 이상의 비통함을 느끼면서 담판 기도를 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타락의 역사적 기원을 잊어버릴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하의 가치적인 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정세계에 있어서의 전통적 역사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들어간다면, 오늘날 통일교회에 속한 자신은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예수가 실패했던 역사를 그냥 인계받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고차적인, 빛나는 승리의 일로를 가자는 것입니다. 내 개체에 있어서도 그렇고, 가정에 있어서도 그렇고, 혹은 민족, 국가, 세계를 넘어서 그와 같은 내용을 책임지고 가야 할 것이 통일교회가 짊어진 역사적 사명이 아니냐. 여기에 '그렇다'고 공인하고 나서게 될 때는 문제가 크다는 거예요.
이러한 입장에서 여러분은 나라가 망해 들어가는 것을 직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이 망해 들어가는 것을 직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족속이 망해 들어가는 것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망해 들어가고 여러분의 아들딸이 망해 들어가는 것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냥 그대로 있어도 한때가 지나가면 자동적으로 순환적인 법도를 따라 가지고 회생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걱정도 안 하겠습니다. 그러나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멀다는 거예요.
이런 것을 직시하는 자리에서 예수와 같은 입장에서 젊은 기백을 가진 사내로서의 책임을 졌다 하게 될 때에, 여러분은 겟세마네 동산을 어떻게 보겠느냐? 그것이 비단 2천년 전에 왔다 갔던 예수만 처했던 겟세마네 동산이냐? 아니라구요. 2천년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예수 이상의 입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체를 중심삼고 볼 때, 여러분이 밤을 새우려 할 때에 여러분의 주위에서 같이 눈물 흘리고 같이 밤을 새워 줄 수 있는 동지가 있었더냐? 내 동료가 될 수 있는 그 누구를 가질 수 있었더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그야말로 비참한 역사시대의 사명을 가진 예수보다 나은 자리에서 보람있는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여기에서 예수보다 못한 입장에 선다면, 심정적 주체로서 상처를 입은 하나님은 어찌하시겠느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담판을 하고 결정을 지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을 자리에, 십자가에 내몰아야 했던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가 예수보다 못한 입장에 서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이냐?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가 갈릴리 가나의 잔치집에서 마리아로부터 술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한 것은 평면적인 면이나, 혹은 이스라엘의 전통적 역사를 이어받은 모자의 관계에서 보면 섭섭한 말이지만, 천륜사(天倫史)가 전복되는 순간을 중심삼고 볼 때에는 당당한 말입니다. 그 어머니가 천륜을 배반하고, 천륜을 파탄시키는 입장에 있으면 여인이 아니라 쌍것 중의 쌍것이라구요. 그런 어머니를 그냥 인정하면, 자기 여편네도 그러고, 자기 자식도 그럴 것이 아니냐.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예수는 장가 안 가기를 잘했습니다. 도리어 잘했습니다. 만일에 여편네를 얻었는데, 그 여편네가 뜻을 대해 가지고 반대하는 여편네가 됐으면 어떻게 하겠나? 자기의 피와 살을 이어받고 태어난 예수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마리아 자신이, 그와 일치되는 내정을 갖추어 가지고 봉헌하지 못한 사실을 바라볼 때에, 동성도 아닌 어떠한 여자를 만나 아내로 맞이했을 때, 그 아내가 뜻을 반대할 때에는 어떻게 하겠어요? 그 아내의 친척들은 예수의 편을 들 것이냐, 아내의 편을 들 것이냐? 어떨 것 같아요? 예수를 편들겠어요, 아내를 편들겠어요? 아내를 편들 거라구요. 그러면 그 종족은 어떻게 될 것이냐? 그 종족 또한 아내를 편들 거라구요. 또, 자식을 낳았다면 그 자식이 예수에게 편드는 것은 가당한 일이지만, 반대할 때에는 어떡할 테냐?
하나님이 이러한 등등의 문제를, 하늘의 섭리를 추진시키는 주체자로서 염려 안 했을 것 같아요? 사람은 번번이 자기를 중심삼고 타락하고,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역사를 엮어 가고 자기를 중심삼은 생활을 하고 있지요. 이런 현실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바라보시게 될 때에, 예수와 만난 그 상대자도 자기를 위하는 입장에서 예수를 남편으로 모시려고 한다면 다 망친다는 거예요. 자식도 자기를 위주로 한 가치적 내용을 가지고 부자의 관계를 원한다면 다 망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랑 문제가 쉽겠느냐?
자,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은 엄청난 문제를 중심삼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축복의 기준은 하늘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희생자들을 대가로 치러 가지고 찾아 나온 축복의 기준이 아니냐? 여러분이 알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입장의 축복이냐? 남자로서 대하고, 여자로서 대하는 그러한 통일교회 가정의 풍습화된 기준으로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냐? 이것을 다시 생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만일에 여편네를 가졌으면, '어찌합니까? 뜻 앞에 어찌합니까? 어찌해야 됩니까?' 하는 문제가 걸린다구요. 당신의 본연의 심정을 대신해서 볼 때에, '우리 가정은 어찌합니까? 내 아들딸은 어찌합니까?' 이게 문제가 된다구요. 밥을 못 먹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구요. 옷을 못 입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구요. 오직 남겨야 할 뜻, 그것이 문제라구요.
영육으로 타락한 아담을 복귀하기 위해 4천년 역사를 거쳐 가지고 예수를 보내서 이것을 탕감하려고 했는데 영육복귀완성의 이념을 저버려 가지고 육적 복귀의 이념은 땅에 묻어 놓고 영적 복귀의 이념만 찾아가신 하나님의 기막힌 사정을 생각할 때 그것은 지난날의 우리가 관념적으로 아는 말의 내용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다' 하는 입장에 선 아버지를 생각할 때, 그런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얼마나 기가 막힐 것이냐.
이런 관점에서 ‘당신은 어찌하시겠습니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나 같은 사람, 나의 가정과 같은 가정, 나의 부부와 같은 부부를 중심삼고 당신은 어찌하시겠습니까?’ 할 때에 할 방안은 심판밖에 없다는 거예요. 할 방안은 처단밖에 없다는 거예요. 할 방안은 최후의 통첩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이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하며 그것을 시인하고 들어가야 됩니다. 그것을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려는 예수는 민족이 망해야 될 것을 시인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붙들고 늘어진 거예요. 망할 수 있는 그것을 시인하고, 유대교를 붙들고 기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다 이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서 예수와 같은 담판기도는 못 했지만, 자기 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해봤느냐? 내 자식, 내 아내를 중심삼고 해봤느냐? 우리 가정을 볼 때 어찌 하시겠습니까 하는 문제를 두고, 그냥 그대로 하늘의 대를 이어 가지고 역사적인 그 국가, 국민의 전통을 남길 수 있는 가정이 못 되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이것을 어찌합니까?’ 하며 내 손으로 치워 버리고, 하늘로부터 저주의 불길을 내려 가지고 살라 버리고 싶은 마음을, 격한 슬픔을 느끼는 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한두번이 아니라 연속되어야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면 가정, 통일교회면 통일교회를 중심삼아 가지고, '아버지여, 금후에 당신은 어찌하십니까? 나는 어찌합니까?' 하는 것은 사정이 다르다구요. 그것은 다르다구요. 하나님이 보는 사정하고, 여러분이 보는 사정은 다릅니다. ‘내 사정이 이러니 이것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는 것은 천 사람, 만 사람이 다 다르다구요. 통일은 있을 수 없는 사정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절대 애당초부터 부정입니다. 그럴 수 없다구요. 그렇지만 주체자로서의 뜻을 중심삼고 ‘당신은 어찌하십니까?’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는 사정이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니예요?
거기에 있어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한 그 자리는 가혹한 자리입니다. 자식을 대하여 살려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있지만, 얼굴을 돌이켜야 할 장면이 아니었더냐. 자기가 사랑하는 처자면 처자, 부모면 부모를 대해 종적인 모든 내연을 가지고 순리적으로 상응할 수 있는 자리가 못 되지 않았느냐. 상충적으로 부딪쳐야 할 입장이 아니었더냐.
그러면 여러분은 그런 뜻을 어디에 세우려고 하느냐? '하나님은 어찌 하십니까?' 하는 자리에 세우려고 하느냐, '내가 어찌하느냐?' 하는 자리에 세우려고 하느냐? 마찬가지라고요. 예수가 서 있던 자리나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는 자신도 설 수 있고 하나님도 설 수 있는 그 자리를 남기려니 할 수 없이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는 갈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아담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데, 아담이 실수한 것을 누구보다도 더 불쌍하게 여기는데, 그분은 나를 버리지 않았던 것보다 더 딱한 입장에 서지 않았느냐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나 때문이 아니고 민족 때문입니다. 민족이 저버린 것이요, 인류가 저버린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인류의 대표로 나를 쳐 주시오. 인류 대신 나를 쳐 주시오'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여기에서부터 심정의 재유발의 역사가 벌어져 나간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아담 해와가 타락했는데, 타락한 아담에게 동생이 있다고 합시다. 그 동생이 타락한 아담 해와를 하나님께서 쫓아내는 것을 바라 보게 될 때에, '부모여! 그 형님 누나를 내쫓지 마십시오, 내가 그 길을 가겠으니 나를 쳐 주시오'라고 부모를 붙들고 그런다면, 여기서부터 새로운 길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역사냐? 아벨의 역사입니다. '죄를 지은 형제보다도 더 비참한 부모의 마음, 그 마음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억울하더라도 그것을 내가 극복하고 내가 책임지겠으니 나에게 짐을 전부 지워 주시오. 형제들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부모의 십자가까지 나에게 몽땅 지워 주시오' 하는 아들이 있다면, 그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감동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구요. 세상에 어떤 부모에게 불효 자식이 있는데, 그의 동생이 불효 자식을 대신해서 마음 아파하는 그 어버이 앞에 나서 가지고 그 부모가 고통당하는 이상의 고통을 느끼면서 그 형을 불쌍히 여겨 가지고, 그 이상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나는 그 어려움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받겠다고 하는 일이 벌어지면, 새로운 전통의 역사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심정세계에 한해서만 될 수 있습니다. 사리와 이치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적 역사를, 이러한 심정적 경로의 역사를 이루고, 타락의 경로의 역사를 뒤집어 박으려니 아담 가지고는 안 되고, 해와 가지고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동생이면 동생, 그 누가 나와 가지고 그 이상 비참한 자리에 나서겠다, 아버지 이상 비참하고, 아들 이상 비참한 자리에 나서겠다고 하는 자가 있으면, 하나님이 그를 칠 수 없으니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아벨의 역사가 아니냐. 하나님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역사를 남겨 오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야말로 과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역사를 통하여서만이 수습된다는 원칙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 아니냐. 그것이 아벨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아벨은 누구냐? 또 다른 가인이나 또 다른 아담으로서 나선 아들, 하나님의 슬픔을 책임질 수 있는 아들의 자리에 선 자가 아벨이 아니냐. 그 아담의 자리를 역사적으로 세계를 대표해 결실한 자가 예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둘의 책임을 진 것입니다. '나라와 세계를 대신해서 나를 쳐 주소서' 이게 예수의 사정이라구요.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아버지의 모든 쓰라림을 대신 지고 내가 여기서 대를 잇겠습니다' 한 자리가 예수의 자리가 아니었더냐? 여기서부터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다른 차원에서의 방향과 요인이 여기에서 개척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지금까지 역사시대를 거쳐온 아벨적인 순수한 유래를 갖춘 전통적인 역사로 보게 될 때에, 과연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 엄숙한 6천년 역사 앞에…, 6천년이라구요, 6천년. 그런데 사실 6천년만 되나요? 그 역사 앞에 그러한 순수한 입장에서 메시아 이상의 내정의 심정을 가지고, 메시아는 세 제자를 뒤에 놓고 그런 놀음을 했지만, 나라와 가정을 뒤에 놓고 그런 놀음을 할 수 있으면 그게 불행한 것이냐? 불행한 것 같지만 불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거기에 동참했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처럼 불행한 자가 될 것이냐? 그 자리에 선 것이 불행한 것 같고 비참한 것 같지만 비참한 것이 아니요,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행복의 요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 역사는 그들로 말미암아 찬란한 승리의 역사, 다른 방향의 기독교 역사가 전개되었을 것이 아니냐. 마찬가지라구요. 마찬가지라구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러한 입장에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 대신 부모를 그렇게 놓고 처자를 그렇게 놓고 그 처자, 부모와 하나된 자리에서 나라를 붙들고 호소하고, 혹은 민족을 붙들고 미래의 자기 뜻에 대한 운명의 길을 붙들고 책임한다 할진대는 하나님은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얼마나 기대하실 것이냐? '너로 말미암아 새로운 소원이 성취될 것이다'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아벨의 역사를 사랑하고도 빛낼 수 있는, 다시 말하면 꽃을 피워 가지고 그 미를 사방에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거기 꽃 가운데 품겨 있는 향기를 사방으로 발산할 수 있는 좋은 찬스가 아니냐. 장미는 건드려야 향기, 향취가 나는 것이 아니냐. 마찬가지 이치라구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 지금 대한민국은 남북이 엇갈려 있습니다. 방향이 다른 입장에서 하나는 남으로, 하나는 북으로 가려고 하는 두 갈래 길이 있으니, 그 목적이 다르다구요. 어떻게 통일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심각하다는 거예요. 그 주체적인 사명을 누가 해야 될 것이냐? 그것을 남한이 하게 된다 할 때 북한이 반대할 것이고, 북한이 하게 된다 할 때 남한이 반대할 것입니다. 자기 자체를 고집하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또 결렬될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남한 사람 누구 보다도 북한을 더 사랑하는 한국사람이 나와야 됩니다. 북한 사람이 북한을 사랑하는 이상 북한을 사랑하는 한국사람이 나오면 됩니다. 그것밖에는 모색 방안, 해결방안이 없습니다. 남한의 그 누구보다도 더 애국하는 사람, 북한의 그 누구보다도 더 애국하는 사람, 그렇게 한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할 때에 거기서 통일방안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 길이 있겠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외에 길이 없지 않느냐 이거예요.
그러면 이 민족은 어찌합니까? 삼팔선을 중심으로 좌우로 경계하고 있는 이 나라에 있어서 그 선상에 선 자들이 우리 통일교회 신자들이라 하게 될 때에, 우리는 어찌합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문제의 해결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그것은 북한 사람보다도 더 고생하고, 남한 사람보다도 더 고생하는 거예요. 이런 고생 가운데 세워진 초민족적인 애국심을 어떻게 들고 나오느냐? 이것이 한국을 살리는 첩경이요, 해결 방안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라구요. 악한 세계와 선한 세계를 통일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라구요. 악한 세계의 충신 이상의 충신이 나와야 돼요. 지금까지 선을 지향해 나오면서 우리 조상들이 세워 놓은 충신의 도리 이상의 충절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결렬된 역사를 수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는 위대했습니다. 둘이 싸우는 패 가지고는 안 된다 이겁니다. 하나님을 위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는 길은 하나님을 위해 죽고 민족을 위해 죽는 것밖에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도리가 아니냐. 인류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역사이래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역사 이래 누구보다도 사랑했기 때문에, 망할 역사가 거기서부터 새로운 방향을 취해 가지고 목적의 세계로 진출했던 것이 기독교 문화권이 아니냐.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라구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이 믿고 있고 여러분이 움직이고 있는 통일교회, 그 통일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통일교회냐? 어때요? 여러분을 지도하고 있는 통일교회의 문선생이라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여러분의 지도자냐? 그가 머물러 있는 그곳을 기점으로 삼아 가지고 민족을 대신해서 '이것이 새로운 발판이다' 할 수 있는 출발의 기점이 어디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거기서 승리를 찬양하고, 태평왕국을 노래부를 수 있는 무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두 세계 이상의 비참한 자리에 서 가지고, 전부가 다 쓰러지고, 부정해 나가자빠질 수 있고, 전부 다 역적이 될 수 있는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시종여일하게 충절의 미를 역사노정 위에 간직할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1960년대의 통일교회, 그것은 지나간 통일교회입니다. 그때에 통일교회는 민족을 위해서 '어찌하십니까?' 할 수 있는 입장에는 못 섰다는 거예요. 그때는‘내 개인을 어찌하십니까?’ 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차원이 다르다구요. 1970년대에 들어와 가지고는 '아버지여, 이 민족을 어찌하십니까? 하는 차원의 시대에 들어오지 않았느냐? 오로지 여기에서 우리의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전통,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것 외에는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죽음으로 부딪친 것입니다. 그것만이 해결 방안입니다.
자기 뜻을 버리고자 하는 예수 앞에 동조자 베드로가 그러지 말라고 하자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수제자로 택해 3년 동안 함께 나오던 그 제자에게 면박하기를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는데 그 말을 잘했어요, 못 했어요? 그 말은 재차 구원하기 위한 말입니다. 그 말이 고마운 말입니다. 거기에서 베드로가 일단 '나는 내 뜻을 바라는 놈이로구나' 하고 골수가 녹아지도록 회개할 수 있는 자신이 되었더라면, 그 회개가 3년 이상 계속되었다면 예수를 저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회개가 3년 이상 계속되었으면 예수를 저버리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안 그래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는, 당신의 뜻을 대해서 어찌하십니까 해야 합니다. 문제가 크다구요. 남한이 갈 수 있는 길, 북한이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여기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여기서 뒤죽박죽하다간 다 망한다는 거예요. 종자도 안 남고 다 망해 버린다구요. 여러분이 그 풍조에 왔다갔다하다가는 뼈다귀도 못 건진다구요. 지금 때가 그런 때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내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당신의 뜻을 이루려니 죽음밖에 없습니다. 백성을 대표하려니 죽음밖에 없습니다' 하며 그 결의를 넘고 나는 데서만이 새로운 소망이 출발할 수 있는 거예요. 십자가를 앞에 놓았던 예수 앞에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안 그래요? 희망이 있었을 것 같아요? 내 뜻을 들고 나왔다간 썩은 호박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양자를 둘 다 걸고 이루어 드리려니, '하나님의 그 슬픔 대신 나를 역사적인 슬픈 자로 죽여 주소'라고 했기 때문에, 2천년 동안 성신과 더불어 비참한 놀음을 하고 나오는 거라고요. 안 그래요? 대신 나를 쳐 주소….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희생되었지만…. 그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희생했어요? 죽을 때 '오, 주여!'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죽음길을 간 그들이 전부 다 이렇게 죽어야 천당가겠다고 했던 패지,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줬어요? 천당가겠다고 했던 패는 많았지만 하늘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죽겠다고 한 사람들은 없더라 이거예요. 자기 실속을 위한 무리는 많았지만, 뜻을 성사시켜 드리고 하나님과 인류의 해방을 위해서 노력한 사람은 없었다는 거예요. 아무도 없더라 이거예요.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이제 통일교회에 있어서 '어찌하십니까?' 이게 문제가 된다고요. 하나님이 '어찌하십니까' 하는 문제하고 선생님이 '어찌하십니까?' 하는 문제하고 여러분이 '어찌하십니까' 하는 문제는 같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패는 망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건 불가피한 결론이 아니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2천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서 수많은 민족의 말발굽에 밟혀 쓰러졌고 총칼에 쓰러진 것이 아니냐. 그러면 지금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은 그 자리를 어찌할 것이냐? 마찬가지입니다.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책임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뭐 선생님이 우리의 책임을 지시면 되지' 하는 입장에 선다면, 여러분은 잠자던 베드로와 같은 무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면 선생님은 '차라리 몰랐으면 좋을 뻔했다'고 책망하던 예수의 심사와 똑같은 입장이 될 것 아니냐. 뭐가 다르냐 이거예요.
윤리적, 도리적 혹은 인륜적으로 따져 보게 된다면 자식이 부모를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시고 가려고 하는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자식의 도리를 하느냐' 이것이 문제라고요. 효자는 부모의 염려를 자진해서 맡는 사람입니다. 충신은 그 나라의 군왕의 염려를 자진해서 맡는 사람입니다. 누구의 통고도 받지 않고 자진해 맡게 될 때에 그는 군왕의 혈족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안 그래요? 명령을 받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구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여러분들, 전국에서 통일교회 전체의 핵심요원 이라고 볼 수 있는 여러분들은 ‘나를 가지고, 나 같은 사람을 가지고 이 엄청난 역사시대에 있어서 뜻을 세우려고 하시는 아버지는 어찌하십니까?’ 하며 심정의 빚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로하기 위해 자기의 면목과 체면을 망각한 자리에서 몸부림이라도 쳐 봤느냐 하는 문제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뭘하고 있는지,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하는 그러한 전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 앞에 그래야 되고, 여러분은 선생님 앞에 그래야 되는 거라구요.
자, 여러분, 우리가 이 수련소를 중심삼고 새롭게 시작하는 이 시간, 벽두에 있어서 이런 말은 비장한 내용의 말입니다. 때가 그런 때입니다. 보라구요. 세계는 우리 앞에 거의 다가왔습니다. 세계는 1974년을 중심삼아 가지고 큰 노도(怒濤)를 겪어야 된다 이겁니다. 배를 타고 이것을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오고, 태풍이 불어오는 것입니다. 정면으로 악과 선이 부딪쳐야 됩니다. 그런 때가 왔습니다. 바로 그런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차고 넘어가느냐? 여기에서 방향이 조금만 틀려 나가면 헛일하는 것이 됩니다. 기계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조절기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거기에 끈을 달아 가지고 잡아당겨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정해 가지고 가야 됩니다. 바람이 세면 셀수록, 자기의 수완과 능력 가지고 조정해야 됩니다. 그래도 안 될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죽음을 각오하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가다가 파선되어 죽으면 하나님이 영적으로라도 수습해 주시는 것이 아니냐. 이것밖에 길이 없다구요. 밀려오는 그 노도를 앞에 놓고 배를 저어 가야 할 사공이 있다면, 그 사공의 운명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사랑의 바람이 불어 주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사공으로서의 자기 최대의 능력을 다 발휘해 가지고 '나는 이 이상 더 할 수 없다. 죽더라도 이 이상 더 할 수 없다. 미련 없이 해봤다'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지게 될 때에는 영혼이라도 그곳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나마 붙들지 못하게 된다면 다 깨져 나갑니다. 그러한 숨막히는 때가 왔습니다.
먼저 '내 아들딸을 중심삼고 어찌하십니까?'가 문제가 아니라고요. '내가 이러니 어찌하십니까?'가 문제가 아니라고요. '나를 계수(計數)에 넣지 마시옵소서. 아버지 뜻을 중심삼고 어찌하십니까?' 해야 된다구요. 그래야 전통이 남아지는 거라구요. 그러한 순교의 자본 없이 죽어서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 마음이 있어 가지고는 천국에 못 가는 거라구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이렇게 죽어야 천국에 가지' 하며 참고 천국에 가겠다고 죽은 사람들은…. 시작은 자기로부터라구요.
'내가 이렇게 돼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의 전통을 이어받을 것이 아니냐' 하면서 예수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갔기 때문에, 이러한 스승의 전통의 사상을 다 이어받아 가지고 땅 위에 그 기틀을 남기고 가야 하는 것이 제자들의 사명이 아니겠느냐? 이러한 마음을 갖고 죽어야 됩니다. 자기와 더불어 천국을 바라지 말고 통일교회와 더불어 천국을 꿈꿔라 이거예요. 나라와 더불어 천국을 꿈꾸는 사람만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적인 관이 아니겠느냐.
그 관을 중심삼고 볼 때에, 오늘날 기독교는 방향이 틀렸고, 관이 틀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망하는 거라구요. 망하는 종교권 역사에 있어서 망하지 않을 종교권이 어떻게 현현할 수 있겠느냐? 반대해야 당연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통일신도들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어찌하십니까? 어쩌다가 이러한 역사적인 문제가 생겼습니까? 아벨과 가인을 찾아 나선 아버님은 어찌하셨습니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고요. 그 얼마나 비참하냐 이거예요. 120년 동안 노아를 찾아 나오시던 아버지는 어찌하셨습니까? 120년 동안 웃고 계셨느냐, 울고 계셨느냐, 마음을 졸이고 계셨느냐? 생각해 보라고요. 노아는 120년 동안 자고 먹고 할 대로 다했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었던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이 유랑하는 집시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수십년 생애를 다 희생시키는 행로에 있어서, 동족에 의한 위험도 위험이지만 이방에 의한 위험, 모든 사방으로부터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니는 길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촌시라도 마음을 놓으셨겠느냐? 마음을 놓으셨겠어요? 야곱의 21년 역사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촌시라도 마음을 놓으셨겠느냐? 21년 동안 밤이나 낮이나 야곱을 들여다보시는 그런 생활을 하지 않으셨겠느냐?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그러한 전통적인 역사를 평면적으로 연결시켜 가지고 세계복귀라는 것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이 오늘날 이 땅을 촌시라도 눈여겨 안 보시는 시간이 있겠느냐? 눈여겨 보시면 어디서부터 눈여겨 보시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 여기가 어디냐? 그곳이 통일교회라고 여러분은 알고 있다고요. 여기서부터 그렇게 될 것이다 하는 곳, 여기서부터 주시하고 싶다 하는 곳, 그곳이 통일교회라구요.
여러분들이 마음에 통일교회를 몇십 년을 믿었는데 '아, 본부에서 몰라 주다니' 이렇게 섭섭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낙제감입니다. 낙제감이예요. 여지없이 낙제감이라구요. '나를 거름 삼아서 다리를 놓아 가지고 건너 가라' 예수님은 그런 사상을 가졌어요. 그러니 죽어요? 죽겠어요? 하나님에 대해서 항소할 수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엊그제까지 나에게 이렇게 대하시더니 무슨 하나님이 그래요? 뭐 이제는 죽으라고요?'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예수도 하나님이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것을 알았겠어요, 몰랐겠어요? 십자가에 죽을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구요. 30평생….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가지고, 그들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결의를 한 이후에 각오한 것이지 그전까지는 '너는 하늘나라의 왕자요, 천지가 다 네 이름 아래에 있고, 네 수하에 천치가 다 놀아나는 것이 아니냐. 역사는 너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요, 네 영광을 위하여 역사는 찬란한 문화세계를 거쳐오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그렇게 안 가르쳐 줬겠어요? 그런데 벼락같은 호령이 뭐예요, 이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것을 믿을 수 있어요? 얼마나 착잡한 사연이었겠느냐.
선생님 자신도 그렇다구요. 하늘나라가 뭐 어떻고 어떻고, 세계가 뭐 어떻고 어떻고 하던 그런 약속은 일시에 없어지고 똥구덩이에다 거꾸로 꽂는 거라구요. '이 녀석아, 뭐 아비를 사랑하겠어, 처자를 사랑하겠어? 이 자식아' 이러시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의 입장을 내가 잘 알고 있는 거예요. 아들딸에 대한 모든 비참한 것을 다 알고 있다구요. 남과 같이 다 먹이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정에 서게 될 때에 어떻게 할 것이냐. 어찌하십니까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내가 '어미 아비의 입장에서는 자식을 생각해야지' 그랬으면 통일교회는 나오지 않았다구요. 문선생이라는 사람이 그런 어미 아비 같은 생각을 했다면 통일교회는 안 나오는 거예요. 내 자식을 생각했다면 통일교회는 안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이 알잖아요? 성진이에 대해…. 외박 살림살이를 철들 때까지 한 것이 아니냐, 그래 가지고 18세를 넘어설 때 내가 불러 가지고 '너, 성진이 이놈아! 아버지가 몰인정하지만 할 수 없다. 네가 부모의 뜻 앞에 어긋나는 일이 있거든 난 책임을 안 진다'고 말한 거예요. 자식을 불러놓고 선서식을 하는 그 아비, 세상에 그런 아비가 어디 있느냐? 아담 해와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천륜의 역사를 비통한 역사로 이끌어 온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식이 잘못하여 하늘의 역사를 침범하게 할 수 없지 않느냐 이거예요. 당연하다구요. 그거 이해 못 하는 거라구요. 여편네를 불러 놓고 '나는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조건을 걸고 헤어져야 할 그런 입장이었다구요. 그게 어떠한 것 같아요? 남자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할 입장에서, 남자의 상판을 가지고 할 수 없는 남자의 노릇을 해야 했던 것이예요. 아비로서의 상판을 가지고, 철면피한 원수의 아비가 되어야 했던 거예요.
그런 놀음을 자긍(自矜)한 역사가 없었지만 통일교회는…. 자식을 사랑하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으며 아내를 사랑하고 싶지 않은 남편, 혹은 부모를 위하고 싶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 가지고 안 되니까…. 그것 가지고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거예요. 하나님이 그랬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느냐? 그럴 수 없으니 '아버님은 어찌하십니까?' 하는 것 아니냐 이거예요. '당신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쩌다가 그런 분이 되셨습니까?' 하는 거예요. 그분이 잘못하셨으면 회개를 해야지요.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에, 뜻을 얼마나 사랑했느냐, 뜻을 얼마나 책임졌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다시 한 번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성경 말씀을 이루어야 될 거 아니냐. '네 어미나 아비를, 네 처자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 제자로되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했으며 그 다음에 첨부해서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나에게 합당치 않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지금까지의 역사라는 것은 죄 있으면 전부 다 예수에게 맡기려고 했고, 하나님께 신세지려고 했다고요. 지금까지 그래 왔다고요. 예수가 그렇게 말한 의미는 네 십자가를 네가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않으니 네 죄는 네가 청산하라는 거예요. 그말이라고요. 도리어 '하나님의 짐을 도맡을 수 있는 너희가 되라. 네 죄는 네가 청산하고, 네 족속의 죄는 네가 청산해라' 그거라구요. 그러지 않고는 나에게 합당치 못하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여러분들에게 종족적 메시아가 되라고 말했지요? 그게 말뿐이예요? 통일교회 문선생 한 사람의 입에서, 가치 없는 입장에서 말했을는지는 모르지만, 영계에 가 보라구요. 말 그대로 종족적 메시아가 되는 거라구요. (잠시 녹음이 되어 있지 않음)
이런 관점에서 새로운 관을 정립해야 되겠습니다. 정상, 꼭대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꼭대기를 향해서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넘어가서는 안 보여야 되는 것입니다. 다 올라가서 아무리 거기서 쉬고 놀고, 뭐 잔치를 하며 살더라도 넘어가지 않을 때에는 망하는 것입니다. 넘어가야 되는 거라구요.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무슨 부장이 되고 뭐 뭐 어쩌고…. 다 허사입니다. 내려가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직까지 행랑보따리를 못 면했다 이거예요. 알겠어요? 피난민이라구요, 피난민.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고객 하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동렬(同列)에 참석한 그런 피난민이 아니냐. 유랑의 민족이 아니냐. 나라 없는 백성이 아니냐. 기가 막힌다는 거라구요. 그 땅이 그리워? 거기에서의 하던 사랑이 그리워? 거기에서 춤추고 지내던 것이 그리워? 그것을 촉구하는 것이 사랑의 정서를 중심삼은 자기 집안 식구이기 때문에, 성경은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했다구요. 네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라고요. 통일교회에서 축복받았다고 하는 축복가정들, 안 그럴 것 같아요? 여러분의 식구가 원수라구요. 둘 다 좋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안 돼 있다구요. 둘 다 좋을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지 않느냐. 남북이 아직까지 통일되지 못했기 때문에 둘 다 좋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둘 다 나쁠 수 있는 입장이니 그것을 누가 책임지느냐? 둘 다 나쁠 수 있는 입장이지요? 그것을 누가 책임지느냐?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이 책임져야 할 텐데, 하나님이 책임져 가지고 해결되느냐? 해결돼요? 해결될 것 같으면 6천년이 안 걸린다구요. 순식간에 ….
누가 책임지느냐? 그것을 책임지는 민족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 민족이 자의(自意)에 의한 민족이 아니라 천의(天意)에 의한 민족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독특한 민족사상이 아니었더냐. 그렇기 때문에 헤브라이즘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하나의 주류로서 지금까지 남아져 내려오는 것이 아니냐. 헬레니즘은 또 그런 반대적인 주류로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구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여러분이 이 문제를 놓고 '어찌하십니까?' 그럴 때가 많을 거라구요. 자식을 바라볼 때에 기가 막힌 장면도 많을 거라구요. 그것도 하나님이 다 잘 알고 있다구요. 선생님도 잘 알고 있다구요. 희진 애기를 이리저리로 전전하게 하면서 남의 집에서 살게 한 그 부모의 마음은 기가 막히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동정한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으로 그 자식이 꿈꾸는 세계 이상의 세계를 찾아 주시려고 한다고요.
자, 이래 가지고 ‘하나님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선생님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나는 어찌하겠습니까?’ 이런 물음에 하나님이 이렇다고 하실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때에는 선생님은 따라가야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여러분은? 비판해야 돼요? 「따라가야 됩니다」 따라가야 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앞장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전국에 있는 통일교회 교인들은 일대 혁신을 해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 자신이 냉정히 비판해 가지고 그것을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니냐. 이런 시점에 놓인 것을 알아야 돼요.
이북 사람이 찾아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여러분이 이제 이북에 전도하러 가야지요? 남한에 공산당이 내려와서 공산당을 선전하게 되면 우리는 이북에 가 가지고 통일교회를 선전해야지요? 「예」 그 싸움에 후퇴해 가지고 뜻이 이루어질 것 같아요? 남한에서 고생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남한에는 통일교회 교인이 굶어 죽는다 하게 되면 보리떡이나 개죽이라도 모아서 먹여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구요. 저쪽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거예요. '저놈의 자식들, 굶어 죽어라' 하며 굶어 죽기를 팔을 내밀고 바랄 것이 아니냐. 그런 가운데 굶어 죽는 시늉을 할 수 있어요? 꿈에도 그 시늉을 할 수 있어요? 내가 못 견디겠다고 표시라도 할 수 있어요? 이를 갈아붙이고 그런 티도 없이 가야 될 것 아니예요? 안 그래요? 그걸 볼 때,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는 외부 사람과 마찬가지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통일교인은 비록 돈이 한푼 없더라도 시시하게 굴지 말라 이거예요. 내가 언제나 요렇게 살다 죽을 것이 아니예요. 십년만 참고 보라는 거예요.
내게 잊혀지지 않는 사실이 있다구요. 여러분이 서대문 형무소 사건을 알지만, 거기에서 옛날에 알았던 신앙의 동기를 만났는데 척 하는 말이 '지금도 그 따위 놀음을 하다가 참 꼴 좋구만' 하는 거예요. 그게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는다구요. 그렇지만…. 거기에서 당당하던 네 자세, 그러나 그 자세 앞에 나는 졸자가 되지 않는다…. 그때의 내 느낌, 그것은 언제든지…. 십년 세월이 지났어도 잊혀지지 않아요. 또 감옥에서 고문받으면서, 생사의 기로에서 뒤넘이치면서 악을 대해서 증오하던 마음은 없어지지 않았다구요. 그런 일이 많다구요. 밥을 안 얻어먹었나…. 안 한 짓이 없다구요. 다 그것이 살아 있는 증거라구요.
이렇게 볼 때, 내가 시시한 패가 되기 위해서 그런 놀음을 했겠어요? 당당한 패가 되기 위해서 그런 놀음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연구해야 되고, 저들이 자겠다면 나는 새벽이라도 일어나서 노력해야 되는 거라구요. 통일교회를 이렇게 발전시켜 나왔다구요.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지금 통일교회는 세계적인 발전을 계획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냥 밥 먹고 그런 생활을 하고 있지만, 뜻은 여러분이 따라갈 수 없으리만큼 비약적인 단계를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아침인지 저녁인지 살펴 가지고 보조를 맞출 수 있어야만 자기가 어떤 같은 목적지에 귀결될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심각한 문제라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 선생님의 뜻, 여러분의 뜻이 다르다구요. 같아요, 달라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찌합니까? 이거예요. 그러니까 살아 나갈 길은 하나밖에 없지 않느냐. 자기를 뜻 앞에…. 부락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 뜻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 이것이 예수가 가르쳐 준 길이라구요. 그것이 전통적인 길입니다. 그 길 외에는 살아남을 길이 없다구요, 통일방안이 없다구요. 그러니 남북을 통일할 수 있는 방안은 남과 북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무리들이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 통일할 수 있는 길이 있어요?
이런 관점에서 현재의 여러분은 진지하게 '나는 어찌합니까? 선생님은 어찌하십니까? 아버님은 어찌하십니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됩니다.‘어쩌다가 하나님은 이렇게 나오셨습니까? ’이렇게 목을 놓고 울어도 끝을 낼 수 없는 비통사에 여러분들이 젖어 가지고 목을 놓고 울어야 돼요. 나라를 보게 될 때, 지금까지 선생님이 생애를 걸어 가지고 수고하던 삼천리 강산이 이제 목전에 다가왔다구요. 일대의 싸움 무대가 전개되는 이 마당에 있어서 여러분은 어찌하겠느냐? 문제가 크다구요.
이러한 중요한 문제를 중심삼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시 청산해야 될 것입니다. 남기고 싶었던 뜻만을 위하여,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은 어찌하십니까?’ 하는 위로의 길에서 죽음길을 자처해 가지고 나섬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망하지 않았다구요. 예수도 부활됐고, 민족도 부활됐고, 하나님도 부활된 것이 아니냐. 그렇지요? 세 가지 다 찾아진다구요. 알겠어요? 이북도 살 수 있는 것이요, 이남도 살 수 있는 것이요, 통일교회도 살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이니 우리의 임무가 막중해요.
그러니까 한 길밖에 없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어요. 그 사상은 주류사상이라고요. 그 사상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울부짖던 사상인 것을 기억하고, 그 원칙에 의해서 여러분이 지금까지의 과거 생활을 비판하고, 현재의 생활을 비판하고, 이제 수련받는 입장에서 그 기준을 다시 정비해 가지고 세우고 돌아가게 될 때에는, 통일교회에는 새로운 차원의 발전이 있으리라 하는 것이 기대되기 때문에, 이런 식구들이 되기를 바라서 말씀을 드렸어요.
아버님, 당신이 그렇게 초라하고 불쌍하신 분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달리고 달려와도 끝이 없는 복귀의 길이 힘든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적마다 아버님은 얼마나 불쌍하신 분인가를 느끼게 되옵니다. 전개되는 환경과 사정이 엇갈리는 것을 직시할 적마다, 언제나 수천년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그러한 무리를 대하시는 아버지 입장은 얼마나 딱하셨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인간세상에 왔다가 하늘의 내정을 살필 수 있고, 깊이 체득할 수 있는 생애가 허무한 생애가 아니고 보람 있는 생애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당신의 은사 앞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신이 체면을 못 세우시는, 당신이 위신과 면목을 못 세우시는 이때에, 자기의 위신과 체면과 면목을 세울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불철주야 허덕이시며 개척의 행로에서 쉬지 않는 걸음을 다짐하는 입장에 계시므로 뜻을 아는 저희들은 밤에도 낮에도 쉴 새 없이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자는 시간도 갖고, 쉬는 시간도 갖고, 자기를 중심삼고 밥먹는 시간도 갖고 있지만 당신은 그럴 수 없는 분인 것을 알게 될 때에, 당신이 어쩌다가 그런 자리에 서셨는지 억울하고도 억울한 것을 느끼옵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사정을 알고 난 그날부터 통일교회에 있어서의 지금까지 거쳐온 역사가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자신을 들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갖지 않은 것을 당신이 잘 아시옵니다. 제가 땅 위에 그 무엇을 남기고, 무슨 권세를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당신은 아시옵니다. 당신이 그러하셨기 때문에 저희들도 그런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어린 자식들을 앞에 놓고 아버지 앞에 호소할 때마다 나와 같은 아들딸이 되지 말라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나도 그런 기도를 해야 되겠지만, 여기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도 자식들은 자기와 같은 불충한 자식들이 되지 말게 해 달라고, 아버지를 대하여 영광의 자리에서 충효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자식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로써 아버지 앞에 다짐지어 놓으면서 가야겠습니다. 그 길이 부모의 길임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땅 위에 아내들이 많이 있지만, 그를 대해 남편으로서는 죽고 죽고 또 죽더라도 그 은덕을 잊을 수 없는 남편의 길을 남기고 가겠다고 다짐하는 여기의 남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전통이 빛나는 역사를 남김으로 말미암아 우리 후대들은 산 증거를 목격했기 때문에…. 예수가 죽음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자리에서도 늠름하였고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당당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직시하였던 제자들은 죽고 난 예수를 다시 회상하는 자리에서 저들이 기독교를 대신하면서 강하고 담대하였던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보여 주는 것이 귀하고 중한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통일교회를 아버지께 책망하실 것이 있다면 그 잘못은 저에게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슬픈 내용이 있거든, 그것은 책임진 사람이 잘못한 연고인 것입니다. 아버지여,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수고로우신 아버지 앞에 이런 기도조차도 할 수 있는 체면과 면목을 가지지 못하였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저희의 사정인 것을 잘 아시는 아버님이여, 남북한을 아버지께서 맡아 주시옵소서. 여기에 기반이 되고, 여기에 생명의 기틀이 되고, 아버지 앞에 제2차적인 결의를 다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죽음길에 나서야 된다는 것을 알았고, 삼팔선을 먼저 넘어야 할 우리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싸움을 책임지고 나서야 할 우리들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엄중하고도 중차대한 역사적인 사명이 오늘날 이 보잘것 없는 저희들에게 있다는 것이, 아버지, 너무나 과중합니다. 너무나 과중합니다. 어느 곳에도 당신이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저희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런 자리에 오셔야 했던 당신이 얼마나 비참하신 분인가를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 이제 전국에 있는 어린 것들이 여기에 왔습니다. 불구의 몸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한 몸으로서 아버지 앞에 왔습니다. 저희의 눈은 뜨이지 않았습니다. 봉사이옵니다. 저희는 귀머거리이옵니다. 저희는 벙어리이옵니다. 아버지의 심정 앞에는 아무런 잘난 것도 갖지 못하였던 것을, 말로는 심정을 얘기했고 입술로는 아버지를 찬양하고 효도를 했지만 진정 내정으로는 하지 못한 것을, 아버지, 이번 기회에 회개하고 돌아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다 털어 놓아야 되겠습니다. 어린애로 돌아가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밥을 주시면 밥을 먹고, 채찍으로 때리시면 채찍을 맞겠습니다. 종아리를 때리시면 종아리를 맞고 빌 수 있는 그것이 감사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사정이 컸고, 아버지의 부탁이 컸고, 아버지의 기대가 컸기 때문에, 그러지 않고는 가실 수 없는 아버지인 것을 알았사오니 응당히 맞아야 할 채찍으로 이제 알고, 저희 자신들이 이번 기간에 다시 한 번 아버지의 긍휼과 사랑과 용서의 희망을 남기고 돌아갈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루한 복귀의 한계선이 저희 목전에 다가오는 것을 바라볼 때에, 불어오는 바람결이 세다고 그것을 바라보고 염려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넘어야 할 물결이 크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어떻게 넘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 지금 당면한 과업이요, 당면한 책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아무리 센 물결이 휘몰아친다 하더라도 뜻을 위한 우리의 본향 땅을 그리워하고 가고 싶어하는 심정만은 지켜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던 이 전통적인 사상을 이어받아 가지고 꽃 피울 수 있는 무리가 돼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대학을 나온 사람도 아니요, 어떤 학문적인 면에 대해 연구한 사람도 아니었지 않습니까? 무식한 베드로가 3천 명을 회개시킬 때도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같이하시느냐 못 하시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지, 지식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민족을 사랑하고 사망을 극히 미워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생명을 지극히 사랑하는 이 충격적인 자신을 어떻게 발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을 알게 하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합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이 수련 기간을 당신의 장중에 두시옵소서. 저희는 아름다운 환경과 더불어 은은한 가운데 자연히 흘러 들어오는 새로운 신비를 체험하면서, 무한히 승리의 개척자의 소망을 이 모든 자연 가운데에서 다시 한 번 느끼면서, 내일의 희망에 사로잡힐 수 있는 하나의 선각자의 모습으로 재차 나타나게 하시어서, 메마른 삼천리 반도 위에, 격동하는 삼천리 반도 방방곡곡에, 한민족 위에 당신의 은은한 사랑의 깃발이 보잘것없는 저희들로 말미암아 들려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야말로 삶으로 보여 줄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 책임을 질 수 있는 무리가 이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바라서 이번 수련기간을 책정하고 준비하였사오니, 이들이 이 마음, 이 뜻, 이 사상 앞에 고이 일치될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과 더불어 '어찌하시겠습니까?' 하고 염려하는 아들, 당신의 뜻과 더불어 '세계를 어찌하시겠습니까?' 하고 의논하는 아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했고 이번 기간을 설정하였사오니, 승리의 결과를 다짐할 수 있게끔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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