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오늘은 이달을 맞이하여 네번째 맞는 안식일 아침이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곳을 우러러 보며 아버지 앞에 경배하는 곳곳마다 당신이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같이하여 주옵소서.

우리 통일의 무리들은 아버지의 남은 복귀의 사명을 책임지고 정성을 모아 최후의 전선에서 승리를 다짐해야 될 긴박한 때에 처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40일 기간을 중심삼고 정성들이는 이 기간 위에 당신의 각별한 지도와 편달이 있기를 바라옵니다.

사람은 언제나 부족하기 때문에 하늘이 원하는 뜻과 그 표준 앞에 어긋나기가 쉽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될 때에, 당신의 수고로우신 복귀 노정에 저희들이 얼마나 얼마나 가중되는 염려의 대상들인가를 다시 한번 느끼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도 저희들만 여기에 남겨 두지 마시옵고, 당신이 현현 하시어서 최후의 한날과 최후의 승리를 다짐하는 데 있어서 하늘이 보람 있어 하고 하늘이 기대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녀들로서 최후의 노정을 지켜 나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아침에 모인 어린 소수의 자녀들을 당신이 굽어살피시옵소서. 인간은 언제나 당신의 뜻을 따라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우기 복귀노정에서 숱한 슬픔을 남기고 있는 악한 선조의 후손으로 태어난 저희들인 것을 생각할 적마다 아버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무한하신 보호가 더하여 주실 것을 다시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여, 이 시간 굽어살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에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아버지 편에 서고,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간절함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늘을 생각하게 될 때 언제나 습관적인 관념을 가지지 말고, 흘러가는 세월의 날들을 맞듯이 무의미한 날들을 보내는 저희가 되지 말고, 하루하루를 뼈살에 사무치는 마음을 갖고 아버지의 뜻의 길을 다짐하고 나갈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이 7월도 이제 후반기에 들어섰습니다. 아버지, 이달도 아버지의 거룩한 뜻 가운데서 저희들이 한 달을 놓고 청산하게 될 때에, 무엇을 하늘 앞에 남기고 무엇을 하늘 앞에 바쳐 드렸느냐 하는 것을 생각 하게 될 때, 언제나 부족한 자리에 처해 있는 것을 자인하게 되오니, 그럴 적마다 저희들이 정성으로라도 그 자리를 메워 나갈 줄 아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전국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지키심과 동시에 이 시대적인 사명을 따라서 일선에 서 있는 세계의 기동대를 아버지께서 지키시옵기를 바라옵니다. 그들이 가는 곳곳마다 당신이 직접 현현하시어서 살아 계신 아버지의 권위를 드러내고, 당신이 운행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 앞에 귀일될 수 있으며,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이 땅 위의 그들을 통하여 통일적인 일치점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땅 위의 완성을 다짐함과 동시에 영계의 해방권을 이를 수 있게끔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왔다 갔던 모든 영인들이 땅 위의 저희들을 통하지 않으면 완성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현재의 저희의 입장이 얼마나 지중한가를 저희들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저희에게는 한 시대를 대신한 것만이 아니라 3시대를 대신해 가지고 연결된 사명을 책임져야 할 방대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 한 사람의 미급함이 과거 현재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 한 개체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과거 현재 미래가 새로운 의미에서 아버지 앞에 바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는 자기의 한 생명이 아버지 앞에 얼마나 간곡한 자리에 서서 효의 도리와 충의 도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여! 이 시간 친히 지키시옵소서. 이 하루를 지키시옵소서. 뜻을 따라 충성을 다짐하는 곳곳마다 당신의 풍부하신 사랑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고, 뜻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고 아버지 앞에 전진하는 무리들 위에는 무한하신 능력의 손길로 같이하시옵고, 승리의 영광이 그들과 같이 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한 많았던 복귀의 한계선을 저희들이 밟고 넘어서 가지고 승리로써 아버지를 모시고, 당신을 찬양하고, 또 당신으로 말미암아 사랑받아 하늘의 하나의 가정의 식구들로서 아버지를 부모로 모시고 효성의 도리를 다하면서, 크게는 온 만국의 중심존재로 모시기 위한 충효의 도리를 다짐하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어린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지금 일선에서 싸우는 곳곳마다 당신이 각별히 같이하여 주셔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현현하시는 가운데서, 무한하신 능력과 무한하신 권위가 그들의 전후 좌우를 친히 옹호하는 가운데서 승리의 날들을 갖게 허락하여 주옵고, 만민 앞에 새로운 사명적인 노정을 제시하고 남음이 있게 허락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전체를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우리 개인 개인들이 처해 있는 환경은 비록 제한되어 있지만. 그 개인이 처한 환경이 가정이면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이요, 그 가정은 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이요, 그 사회는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이요, 그 나라는 세계의 환경을 대신할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한 개인은 자기 한 존재에 한한 것이 아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할 때, 자기라는 한 사람은 자기에게만 한하여 있지 않음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 하게 될 때 그 나의 배후에는 가정이 연결되는 것이요, 그 나라, 혹은 이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평면적으로 세계 인류를 대신해 있음과 동시에, 하늘이 이 땅을 대해 가지고 주체적인 입장에 서 있다면, 우리한 개체라는 것은 땅을 대신할 뿐만 아니라 주체 되는 하늘을 대신해서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하나의 태도는 나 하나에서 빚어져 가지고 나 하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연결 되어 가지고 사회를 넘고 국가를 넘어 세계까지 인연되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건들을 우리가 추적해 보면, 그 역사적인 사건이 역사적 기준까지 되어진 이후에는 큰 것으로서 기억될 수 있으되, 그 당시에는 그것이 별로 인간들 앞에 알려지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취급받아 그냥 지나가 버리는 사실들이 많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리 역사적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역사적 사건으로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끔 그 사회나 국가는 늘쌍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때가 지나고 나서, 한 시절이 가고 나서, 다음 시절에 와 가지고 어떠한 특정한 인물이면 인물이 거쳐갔던 것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인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두고 보면, 30여 생애를 두고 싸워 나오던 그의 행로를 두고 볼 때에, 그 시대에는 그가 움직이는 모든 생활 자체를 공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분이 대했던 환경은 그분을 위한 환경이 아니라, 그분과 상치되는 환경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유대 교면 유대교, 이스라엘 민족이면 이스라엘 민족을 두고 볼 때, 그들 가운데는 그렇게 바라던 소망인 메시아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메시아를 메시아로 모실 수 있는 소수의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이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비참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혹은, 유대교로 볼 때는 유대교의 말로(末路)를 예고할 수 있는 비정하고도 통절한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4천년 역사를 거치면서 하나의 선민적인 터전으로 고이 길러 오면서 한 줄기의 소망을 남겨 가지고 지도하셨던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보낸다는 그 약속을 따라 가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4천년 숙명의 그 모든 터전이 현실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개개인에게 연결될 수 있는 환경을 맞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환경에서 메시아라는 소망의 존재를 맞아들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되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왔던 그분을 보내 놓고 나서, 그분의 뜻을 알지 못한 자리에서 쫓아 버린 그 민족과 그 교단은 여지없이 처참한 결과에 봉착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를 보낸 하나님은 그가 어떠한 사명을 갖고 이 땅에 왔고, 또 그가 해야 할 책임이 무엇인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아무리 사회가 환영하지 않고 그 시대가 그를 용납하지 않더라도 부정된 그 환경을 타개해 가지고 긍정적인 환경으로 개척해 오셨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그 사명을 인계받아 가지고 그 뜻을 따라 발전해 나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역사가 지나고 난 후에야 그가 어떠한 사명을 갖고 왔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추모하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천운을 알지 못하는 인간

이렇게 보게 될 때에, 사람이 자기 일생의 운명이 언제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침에서 낮으로 교차하게 될 때 교차하는 그 시간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혹은 아침과 저녁을 잇는 자정이면 자정, 오정이면 오정, 그것이 언제 넘어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순간에 지나가는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시계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몇 시라고 하고 있지만, 그 몇 시라는 정확한 시간, 그것은 전도 아니요 후도 아닙니다. 없다면 없는 것 같은 그 선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 일생에 있어서 자기가 성공할 수 있는 일이나, 혹은 실패할 수 있는 일이 어느때에 나에게 찾아오고 관계맺어지느냐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지내 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운세를 두고 볼 때 국가의 운세도 그것이 언제 어떻게 찾아와 가지고 언제 지나가 버리는지도 왕왕 잊어버리가 쉬운 것입니다. 그것을 적절히 알아 가지고, 전후를 맞추어 가지고 출발이 이랬기 때문에 끝은 이래야 된다는 서로의 뜻이 맞는 확실한 길을 알고 국가면 국가 자체가 갈 수 없는 것을 우리가 생각 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세계의 운세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어느때에 이 세계에 비운이 찾아들겠느냐 하는 문제도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때에 세계가 하늘의 뜻이면 뜻을 중심삼고 승리의 한때를 맞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도 그때가 오더라도 이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기란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사실들을 미루어 봐도 그렇고, 우리 생활적인 제반사를 두고 보더라도 확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사명을 책임진 사람들, 혹은 큰 책임을 짊어지고 선두에서 가는 사람이 있다면, 선두에서 달리는 그 사람들도 역시 언제나 자기가 가는 길에 대해서 항상 주시하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 책임자가 잘못하게 될 때는 그에게 속한 전체는 비운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책임자가 비운의 자리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자기가 그것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천운에 맞게끔 해결짓게 되면, 해결하는 그것이 당대에 있어서는 비참한 것 같지만 지나고 나게 되면 역사적인 승리의 기점을 맞는 거룩한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한 사람의 생활이라는 것은 자기 하나만의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혹은, 중요한 책임을 짊어진 사람도 자기 하나만이 아니지만, 중요한 책임을 짊어진 그분이 결정한 것을 따라가는 사람도 자기 혼자가 아닙니다. 그가 혼자 움직이지만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역사적 인연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선조로부터, 그 사람이 자기의 선한 선조면 선한 선조, 악한 선조면 악한 선조의 인연을 따라 가지고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들의 가는 길은 반드시 그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그런 현시점에 있어서 자기가 어떻게 결심하고 결정짓느냐에 따라 새로운 시대를 맞아들일 수도 있고, 새로운 시대를 저버릴 수도 있는 입장에 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승리나 절망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우리 통일교회의 교인으로서 현재의 입장에 서 있는 우리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되겠느냐? 언제나 자신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승리를 했다고 자랑하는 그 순간은 자기 일생에 있어서 최후의 기쁨의 통고가 되는 동시에 그것이 끝남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그 이상의 비운을 맞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한 장면을 자랑하고 그 자랑이 끝나자마자 그 이상의 슬픔이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면을 보게 되면 비운에 싸여 가지고 지극히 낙망한 자리에서 '나는 이제 절망이다. 나는 이 이상 갈 수 없다. 나는 이 이상의 소망을 바랄 수 없다'고 하지만, 그 누구와의 어떤 인연을 통해 가지고 절망의 자리에서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소망을 갖고 힘차게 재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이요, 슬퍼하되 절망적인 자리에서 슬퍼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기가 자랑할 일이 있다면 그 자랑은 오늘의 자랑으로서 끝나지 말길 바라야 됩니다. 자랑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자랑은 내일의 빛나는 계승을 할 수 있는 자랑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만으로 끝나는 자랑이 되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만의 자랑이 되게 된다면, 다음에 비운이 찾아오면 그 비운은 도리어 더 비참할 것이 아니냐, 자랑하지 않았다면 더욱더 좋았을 것이라고 느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이 있더라도 그 기쁨이 종결될 수 있는 목적점이 더 빛나는 기쁨으로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기쁜 자리에 서면, 내일의 보다 높은 승리의 한점을 다짐해 가지고 겸손히 바라볼 수 있는 제 2 차적인 혹은 고차적인 소망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 선다면, 그는 자기의 기쁨에 대한 자랑이 끝난 후에 아무리 비운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 비운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저력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 가운데 있더라도 그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만사는 돌아가는 것이 이치입니다. 한 번 높은 때가 있으면 낮은 때도 있는 것입니다. 양지와 음지가 서로 교체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내가 아무리 슬픈 자리에 섰다 하더라도 그 슬픔은 보다 빛날 수 있는 기쁨을 빛내주기 위해서 찾아오는 슬픔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슬픔을 소화하고 그 슬픔을 기쁨으로 맞아 넘어서게 될 때 그 후에 찾아오는 기쁨이 있다면 그 기쁨은 그야말로 그 슬픔이 깊었던 이상의 빛날 수 있는 기쁨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때, 아무리 슬픈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슬픔으로서 모든 것을 청산하지 않고 슬픔 후에 찾아올 수 있는 빛난 기쁨의 한때를 위하여 그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으로 끝을 맺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대처해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

이런 관점에서 예수를 맞이한 이스라엘 민족을 두고 볼 때, 예수라는 분은 하늘이 보낸 분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보게 될 때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귀한 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과정에 있어서 예수가 나타났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 중에서도 지극히 큰 사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앞에 최대로 기쁠 수 있는 것인데, 그가 나타나는 데는 기쁠 수 있는 내용으로 나타나지 못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랑하고 그들이 행복의 터전으로 삼고 있던 구약시대의 모든 진리를 중심삼고 보면 이것이 모두 상충적이고 파탄적인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나 유대교는 이것을 정면적으로 충돌해 가지고 해결하려고 했는데, 거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실수가 있었고 유대교의 실패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를 바라볼 때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행적은 역사 이래 놀랄 만한 것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방이 우러러볼 수 있고, 환경이 움직여질 수 있는…. 그런데 자기 입장이 침범을 받고 자기 입장이 치우침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을 방어하고 그것을 슬퍼한 나머지 예수를 대하는 데 있어서 크나큰 실패를 가져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지 않고 예수를 대해 가지고 '저가 저렇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충고와 어떠한 새로운 무엇을 계승시켜 주기 위한 것이 아니냐. 이것을 두고 보고 이것을 극복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망해 있는, 로마의 속국이 되어 있는 이 나라 앞에 새로운 내일이 찾아올 것이 아니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누구도 갖지 못한 민족적 저력, 4천년 동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온 저력을 가지고 참고 기다리는 가운데 두고 봤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적인 참사를 당하는 비참한 민족이 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자리에서 예수에 대해서 다시 타진하여 그 결과가 좋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와 영합했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상에 있어서 그러한 비참한 민족이 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두고 미루어 볼 때에 사실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두고 보면, 그들에게는 예수가 죽은 것이 지극히 비참한 것입니다. 베드로를 두고 볼 때, 열두 제자를 두고 볼 때, 예수가 죽은 것은 그들의 모든 생명선이 절단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가치관이 여기에서부터 근절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조급해하지 않고, 예수가 가면서 한 말씀, 일러준 말씀, 절망의 귀결로서 끝나지 않는다고 가르쳐 준 그 말씀을 중심삼고 조급해 하지 않고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고 꿋꿋이 나갔더라면, 베드로면 베드로, 열두 사도면 열두 사도는 그렇게까지 하나님을 몰라보는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도 물론 비참하게 한 민족이 되었지만, 죽음의 자리를 찾아가는 예수 앞에 그 제자들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준 존재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법정의 심문받는 자리에서 어떤 종이 나와 가지고 베드로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라고 반문할 때, 그것을 서슴치 않고 부정하는 베드로였습니다. 만일 '이와 같은 법정의 자리에 선 것은 이것으로 역사는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출발한다' 하는 신념을 갖고, 과거지사를 그런 신념의 기반 위에 집중시켜 새로운 소망을 그리면서 꿋꿋이 서 있었더라면 그는 역사에 비참한 오점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당면한 문제나 환경을 극복해 나가려면

이런 것을 미루어 보아 우리 통일교인들이 통일교회를 믿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대다수가 자기가 동기가 돼 가지고 믿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방에 나가 전도하는 통일교회 대원들을 통해, 여자면 여자를 통하든가 남자면 남자를 통하든가 해서 들어오게 될 때, 물론 말씀은 통일교회 전도대원들이 했지만 그 말씀은 자기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듣는 그 말씀 자체보다도 고차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고 난 후에는 자기 마음이 이끌려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것을 느낌과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결정지어 가지고 통일교회 식구가 된 사람이 많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영계가 직접 가입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내 한 생명을 이 길에 세우기 위해서 배후에서 하늘이 동참해 가지고 내 길을 모색해 준 사실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이 길을 부정하고 나선다면 하늘은 어떤 면으로라도 이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입체적인 배후를 가지고 얼마나 얼마나 수고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를 지내온 통일교회 교인들 가운데서, 나가는 도상에 어떤 어려움에 부딪치게 될 때 그 어려움을 단순한 어려움만으로 맞아 이것을 해결하려다 중도에 떨어져 나가는, 혹은 중도에 낙심하는, 중도에 지쳐 버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왕왕 보게 됩니다.

모든 일이라는 것은 좋은 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단 것만 매일 먹어 보라구요. 그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단것을 진짜 자극적인 면에서 알아보려면 쓴 것을 맛봐야 되는 것입니다. 쓴 것을 맛본 후에는 보다 빛나고 보다 높은 단맛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전파를 보더라도 이것이 소밀력(疏密力)관계로서 전파되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직선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한때가 있으면 또 다른 한때가 이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어오게 될 때는 경계선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때하고 다음에 찾아 오는 한때하고 같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거기에는 반드시 정상적인 것이 아닌, 지금과 같은 정상적인 환경과 다른 모양을 거치지 않고는 새로운 사건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하늘의 인도함을 받아 자기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자기 앞에 환경의 변화가 오게 되면 그 환경 변화에 좌우되는 무리가 많은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어떤 환경의 변화가 오더라도 그 환경을 직선으로서 뚫고 나가게 되면 그 변화는 보다 내일의 소망의 터전을 넓혀 주고, 내일의 공고한 전통적 기반을 확고히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동요함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올 새로운 전반적인 축복의 터전을 파탄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때가 얼마나 얼마나 많았는지 우리는 알아야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문제를 당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직시해 가지고 정오(正誤)를 가릴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에 좋은 일이 있으면 그 배후에 찾아오는 슬픈 일이 있게 될 때, 그 슬픔과 좋은 일은 상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결실을 맺기 위한 정상적인 과정

하나의 씨를 심었으면 그것이 열매맺히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싹이 나오고, 줄기가 나오고, 가지가 나오고, 잎이 나오고, 꽃이 피어야 열매가 여는 것입니다. 그 떡잎이 나오고 줄기가 나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줄기에서 가지가 뻗는 것도 다른 것입니다. 가지에서 잎이 나오는 것도 다른 것입니다. 잎에서 꽃이 피는 것도 또 다른 것입니다. 꽃에서 열매맺는 것도 또 다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전체는 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떡잎의 자리에서 줄기가 나온다고, 그것이 다르다고 해서 그걸 부정하는 자리에 서면 그는 가지를 못 만들 것입니다. 줄기에서 가지가 나온다고, 그것이 다르다고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잎을 못 볼 것입니다. 가지에서 잎이 나온다고, 그것이 다르다고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꽃을 못 볼 것입니다. 잎사귀가 나오고 꽃이 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결실을 못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사건인 것입니다. 이것은 한 일을 완성하기 위한 필연적인 운명의 길인 것입니다. 새로운 싹에서부터 줄기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맞지 않더라도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줄기에서 가지가 옆으로 동서로 뻗어야 되는 것입니다. 곧장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가지에서 잎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이 피어야 되는 것입니다. 꽃에는 반드시 하나의 열매가 맺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하나의 나무가 싹으로부터 결실되기까지 이러한 과정이 연결되어 하나의 바람직한 결실을 맞는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우리 인간 하나가 완성이라는 것을 향해 나가는 데 있어서, 혹은 한 국가가 완성을 바라며 나가는 길에 있어서, 혹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섭리를 중심삼고 한때의 완성을 바라고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늘 좋은 때만 바라고 있다면 이것은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리에서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소생기에도 소생 장성 완성이 있고, 장성기에도 그렇고 완성기에도 그렇습니다. 전체를 보게 되면, 이 전체의 소생 장성 완성이라는 단계는 변천적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 이겁니다. 이것을 볼 때 그것을 연결시켜 가지고 그 환경에 상충이 없게끔 조화적인 입장으로 흡수시킬 수 있는 터전으로 넓혀 나가는 데 있어서 발전적인 귀결점을 바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오늘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로서 현재의 여러분은 각자가 다 다른 것입니다. 각자의 얼굴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얼굴이 다르다는 것은 각자가 역사시대의 선조로부터 이어받아 온 후손이기 때문에 그 선조들이 걸어온 역사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내가 태어났습니다. '나'라는 것은 나 하나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선조의 산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물은 나로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나는 미래의 선조로서 결정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어서 나무로 말하면 잎이면 잎이 얼마만큼 잎으로서의 충실한 자리에 서서 그 영양을 섭취해 가지고 그 나무 전체가 자라는데 얼마만한 공헌을 했느냐에 따라 가지는 그 방향을 달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에 대해 속단하지 말고 침착해야

이렇게 보게 될 때, 오늘날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입장이라는 것은 가장 심각한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잘못하면 과거를 망칠 수도 있고, 잘하면 과거를 빛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좋다고 하는 것이 내일도 좋다고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에 좋다는 것이 내일 슬픔을 보장하는 터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슬픈 것이 오늘의 슬픔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에 좋을 수 있는 터전을 이어받는 좋은 경각성을 제시하는 것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나 현실적인 환경에서 어떠한 문제를 대하게 되면 침착해야 되겠습니다. 속단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래 참고 그것을 감정해야 되겠습니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어떠한 우연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두고 두고 해결해 나가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어떠한 인연이 지어질 수도 있지 않느냐? 이러한 문제를 두고 두고 생각하면서, 두고두고 보아 나가면서 해결짓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겠느냐 이겁니다.

사람들 중에는 왕왕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이런 후회를 합니다. 만일 그런 문제를 두고 심사숙고해 가지고 '이것은 내 자신을 두고, 내 생애를 두고 맹세하고 결단을 지었다'고 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했다면, 그는 책임을 져야 되는 것입니다. 후회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격을 알고 자기가 결정한 것을 소중히 여긴다면, 만약에 결정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그 실패를 달갑게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할 것이 아니냐. 그렇지만 실패한 것을 나는 책임질 수 없다고 하며 변명하는 무리는 인간세계에서도 환영 못 받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환영 못 한다면 역사는 더욱 환영하지 못하는 것이요, 역사가 환영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더더욱 환영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기쁨과 슬픔을 대하는 참된 자세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환경을 지니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내가 취해야 할 자세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세를 어떻게 취해야 되느냐? 기쁜 일이 있으면 기쁜 일로 맞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지혜로운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다고 해서 기쁜 일만으로 일방통행이 안 되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기쁜 일로 맞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나로 말미암아 슬픔을 맞을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다면 이것을 냉정히 맞아들여야 되겠습니다. 분석해야 되겠습니다. 그 기쁨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제삼자의 것으로 보관시켰다가, 타진해 가지고 내 것으로 나누어 갖는…. 또 그러한 다짐을 하고서 내 것으로 받아 가지고 관리하고 소화하겠다는 사람은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슬픔이 있으면 슬픔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슬픔을 대해 가지고 내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말고, 그 슬픔을 중심삼고 제삼자의 것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두고 보아 가지고 내 것으로 완전히 소화시킬 수 있으면, 그 슬픈 것이 나를 망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슬펐던 일이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주위 환경으로부터 신임받을 수 있는 좋은 찬스가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저런 슬픔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슬픔을 이렇게 소화시켜 넘어가는구나' 하게 될 때 그 인격이야말로 주위 환경에서 신임받을 수 있는, 그 이상의 문제를 책임질 수 있는 중심존재로서 신임받을 수 있는 좋은 조건도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체는 손해났지만 환경에 있어서 이익될 수 있는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더우기나 신앙생활에서는 이런 태도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봤다고 해서 '내 눈으로 봤으니…' 하며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들었다고 해서 속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고두고 보아 가지고 이것을 자기와 관계를 맺어 가지고 '나는 발전해야 되겠다. 나는 보다 전진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있으면, 전진하는 그 방향을 중심삼아 가지고 어떻게 소화하느냐?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소화시키느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 여기에는 슬픔도 나쁜 것만이 아니요, 기쁨도 좋은 것만이 아닙니다. 소화 여하에 따라서는 슬픔이 도리어 기쁨보다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는 이러한 자세가 필요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신앙자들만이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닙니다. 책임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 앞에는 더더욱 이게 필요한 것입니다. 누구누구로부터 어떠한 보고를 받았다 하게 되면 책임자는 그것을 속단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려 가지고, 전과 후의 결과를 타진해 가지고 그것이 미쳐지는 결과가 전체의 환경에 치우침을 받게 될 때는 이걸 방어해야 되고, 그것을 보류시켜 나감으로 말미암아 전체의 환경에 이익될 수 있으면 보류시킬 줄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모름지기 잊어버리고 넘어가게 됨으로 말미암아 전체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도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책임자라고 해 가지고, 자기에게 관계되는 모든 것을 속단하는 사람은 큰일을 책임질 수 없는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담 해와의 타락에 하나님은 어떻게 대처하셨나

그러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겠느냐? 우리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겠느냐? '인간이 타락을 했다' 이것은 일대 돌변적인 사건입니다. 있어서는 안 될 지극히 문제되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맞은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당장에 처단해야 될 문제였지만….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을 때, 당장에 하나님이 타락 하자마자 '이놈들아' 하며 쫓아냈느냐? 여러분, 어떻게 생각해요? 타락 하자마자 즉결처분해 가지고 쫓아 냈겠느냐?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담 해와 자신들이 '타락이 어떻더냐?' 하는 것을 잘 알게끔 한 후에 쫓아낸 것입니다. 한 법정에서 죄인을 판정하는 법관은 죄인에게 '당신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결과를 응당히 맞아야 되는 것이다'라고 해야 명재판관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타락한 아담 해와를 대해 가지고 즉결처분했느냐? 자신들이 거기에 대해서 몰랐다면 그것이 뼈에 사무치게 알 수 있게끔 시간적 여유를 주었을 것이 아니냐, 슬프다고 해서 당장에 복닥불나게 처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들이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고 난후에 처분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장이 아닐 것이요, 시간적 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당장에 쫓겨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는 아담 해와 자신들이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점점점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했을 것이 아니냐? 세상도 그렇지 않아요? 그리하여 그 이상 주저해서는 이것을 지탱 못 할 것을 안 아담 해와가 도리어 '하나님 앞에 얼굴을 영영 나타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생각 하는 그때까지 기다려 가지고 하나님은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쫓김 받는 아담 해와는 눈물을 흘리고 떠났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량 있고 그렇게 사랑하던 그 부모를, 하나님을 버리고 나서야 할 자신들은 자기 자신을 걸고 한탄했지 하늘을 걸고 원망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돌아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까지는 장구한 세월을 거쳐 가지고 그들이 쫓김받는 자리에 섰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계에도 그래요. 영계에 가게 되면 무슨 천당을 하나님이 보내는 것이 아니요, 지옥을 누가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결정해 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그 기간에 얼마나 괴로웠겠느냐 이겁니다. 희비극이 교차되는 그런 입장에 섰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참은 입장이었기 때문에 도리어 그 인간을 대해서 다시 구해 줄 수 있는 아량의 마음도 거기서 생겼을 것이 아니냐. 극복이라는 그 자체, 참았다는 그 자체가 원통하고 분한 것이지만 그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도리어 구원의 문을 개방할 수 있는 하나의 열쇠가 찾아졌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그러한 입장에서 처리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들도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쫓겨나는 아담 해와를 대해 가지고 하나님도 비통한 자리에 섰을 것입니다. 본래는 저래서는 안 될 모습이…. 세상에도 그렇지 않아요? 진정 사랑하는 자식이, 옛날에 죄를 짓지 않았을 때는 자연스럽게 부모 앞에 와 가지고 품길 수 있었고 얼굴 그 어디에도 주름살이 없이 대할 수 있었던 자식이, 뭘 하나 잘못해 가지고 쭈뼛쭈뼛하며 자연스럽지 못한 것을 볼 때에 부모는 그 환경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거기에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클 때는 거기에 동정의 마음이 싹트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엇갈리는 환경의 여건이 우리 앞에 부딪쳤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전부 다 일방적인 사람이 아니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슬픔에 처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앙자의 자세,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느냐?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자리에 내가 부딪혔다 할 때 그 눈물은 누구를 위해 흘려야 되느냐? 그 유래를 따져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눈물 흘리는 것이 나만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라면, 그것이 제삼자에게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돼요.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슬픔이 있으면 제삼자에게까지 영향이 미치게 환경을 그저 휘저어서 구정물을 내 가지고 자기가 슬프니 제삼자도 슬프게 만들고야 마음이 편안한, 그런 종류의 사람들도 있다구요. 그건 잘못 돼서 그런 거예요.

이 슬픔이 누구로 말미암아 슬프냐? 뜻으로 말미암은 슬픔이라면 전체가 슬퍼할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전체의 슬픔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자기로 말미암아 되어진 슬픔이라면 뜻앞에나 전체 앞에는 절대로 침범시켜서는 안 됩니다. 내 것은 내가 해결 짓겠다는 이런 사람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보다 더 큰 책임을 맡겨주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현재 처해 있는 자리보다도 보다 차원 높은 자리로 발전시키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우리 신앙자의 태도…, 신앙의 길이라는 것은 하루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믿다가 내일 그만둘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넘어서 영원이예요. 영계에 가서도 우리가 하나님 믿어야 된다구요. 하나님을 모셔야 된다구요. 차원 높은 의미에 있어서 신앙해야 된다구요. 안 그래요?

신앙생활에는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추가 있어야

인간은 언제나 사랑받으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분야 분야의 엇갈리는 일에 있어서, 여러 가지 분과별로 일의 종류가 달라짐에 따라 거기에 처해 가지고 일하게 될 때, 그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해 하나님이 명령하는 데는 사랑을 가지고 명령 안 한다구요. 네가 일을 잘했느냐, 못 했느냐를 추구한다구요.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일을 중심삼고 추구하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가 발전할 수 없고, 보다 높을 수 있는 자리에 못 가며, 보다 높을 수 있는 자리에 못 가면 보다 높은 사랑의 인연을 못 맺기 때문에…. 보다 높은 사랑의 인연을 맺으려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당하는 만사는 모두 행복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러한 태도가 가장 귀한 것이 아니냐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하루 아침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생 동안…. 신앙생활 가운데 있어서, 내가 죽더라도 영원을 중심삼고 신앙해 나가는 길에 있어서, 내가 그 절개를 지켜야 할 것이 문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중심 되는 골자가 있어야 됩니다. 영원히 믿고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영원히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나라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부모 앞에 불효는 할 수 없다, 그건 죽더라도 영원히 할 수 없다' 하는 관이 서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는 부모 앞에 언제나 신임받을 수 있는 자식이 될 것이요, '부모를 배반할 수 없지' 그런 결심이 없는 사람은 가다가 언제라도 불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추가 있어야 됩니다. 핵심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 '내게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나 자체의 슬픔은 영원하더라도, 나 자체의 고통은 영원하더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고통으로 제시할 수 없다. 나는 하늘 부모를 모시고 나왔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하늘을 대해 부정의 도리를 세울 수 없다' 하는 철칙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을 못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내가 있고 하나님이 있지, 효자도 내가 있고 효자지, 충신도 내가 있고 충신이지' 하는 사람은 효자가 아니요, 충신이 아닙니다.

영원을 가로막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앙길은 하루에 가는 길이 아닙니다. 영원한 길이기 때문에 영원을 더럽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을 가로막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가 책임지지 못할 문제를 가지고 영원한 하늘 길을 가로막는 무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역사시대에 가롯 유다 같은 사람 보라구요. 그 당시에 예수님이 '저는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다'고 했으니, 그는 그릇된 거라구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영원을 두고 가려 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일시적인 어떠한 욕망의 여건을 보고 판단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경솔한 짓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길을 안 갈 수 있어요? 며칠 안 되어 가지고 파투나고, 자기의 옛날 길로 되돌아오려고 암만 노력했댔자 그런 행동을 저지르고 나면 돌아올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을 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주류적인 그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내가 죽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악물고 혓바닥을 깨물고라도 결정적인 말은 하지 않아야 된다구요.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돼요.

통일교인들을 가만 보게 되면, 뭐라고 할까 부평초와 같은 녀석이 많아요. 이 길이 자기들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길을 지도하고 있는 통일교회 선생님이면 선생님, 하나님이면 하나님에 대해서 뭐 어떻고 어떻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루살이 사람들이라구요. 자기가 그렇게 말한 것이 자기 목을 자르고 사지 전체를 구속해 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한 번 말했으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 책임은 일신의 생애를 통해서 져야 되고, 만약에 그가 책임 다하지 못하게 될 때는 후손까지 걸려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가까운 자리에 두지 않더라구요. 그거 무슨 말인지, 여러분, 알겠어요?

통일교회의 신앙길은 생애를 걸고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주류의 행로를 걸어가는 그 길에 대해서 이러고 저러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두려운 것입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자기가 걸려 버립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거기에는 풀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맨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매고 자기가 푸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동기가 되고 하늘이 과정이 되고 하늘이 결과가 되어 가지고 갔기 때문에 거기에 말려들게 될 때는 영원히 말려들기 마련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에서는 언제나 나는 죽더라도 이 일만은, 하나님만은….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죽음을 남기면 남겼지 그렇게 걸릴 수 있는 말은 남길 수 없다' 하는 신념이 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하나님도 그를 세워 쓰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지도하고 있는 통일교회 문선생도 그래요. '어떠한 수난이 엇갈린 곡절에 가서 부딪친다 하더라도 딴 것은 다 제쳐 놓고요 문제만은 요지부동이다' 하는 게 있다구요.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理 문제만은 터치할 수 없다. 이것은 내가 신앙으로서 안고 죽어야지, 이것을 털어 놓고 죽을 것이 아니다'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저버렸다 이겁니다. 나는 생애를 통해서이 문제만은 잃을 수 없다는 그 무엇이 있어야 돼요. 줄기가 있어야 된다구요.

그래야 나는 죽더라도 내 신앙이 그와 더불어 그 영원한 뜻과 더불어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뜻이 이루어질 때가 되면 나의 부활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 막혀 버리면 부활은 무슨 부활? 하나님은 그렇게 어리석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무리 변명하더라도 통하지 않는다구요. 그 무엇이 있어야 될 게 아니예요?

신앙길은 하루에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몇 사람의 칭찬을 받는 자리에 있다면 거기에는 더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직까지 영원히 개척해야 할 신앙의 자세가 완연히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더우기나 부인들은 그러한 데 더욱 주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믿고 나가는 것이요,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길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하루살이 일로서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루의 기분으로 이러고 저러고 할 것이 아니예요. 자기에 대해서는 이러고 저러고 할 수 있지만 주류적인 신앙의 대상에 대해서는 이러고 저러고 하면 안 됩니다. 그건 차라리 믿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다가는 배반자의 역사를 거기서 드러내고 가는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베드로와 같은 자가 될 거예요? 환경이 다르다고 해서 베드로의 후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들이 잘 알고 있어야 돼요. 이것만은 내가 죽더라도 믿고 나가겠다, 이것만은 죽더라도 보호하고 나서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하늘의 중요한 책임을 짊어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어요.

선은 공적인 것을 위해 손해보는 것

이렇듯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의 대상,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엔 뭐냐? 신앙의 주체 되는 하나님은 사람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요것이 엇갈려요,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 문전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 자신이 남겨야 할 하나의 골수적인 사상을 지니고 생사를, 같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 나오는데 하나님이 사람 앞에 어떻게 하느냐? 이게 문제예요. 하나님은 사람 앞에 이랬다저랬다하지 않는다구요. 정했으면 정한 대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했으면 손해보는 일이 있어도 그것을 변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했으면 손해를 달게 받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손해나게 되면 달게 안 받는다구요, 할수없이 받지. 그게 다른 거예요. 그 차이예요.

이것을 볼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같은 태도를 가질 줄 알아야 됩니다. 공적인 분야에서는 선한 사람이라면 공적인 문제를 두고 이익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공적인 생활을 두고 선하다고 하게 될 때는 자기가 이익볼 수 있는 자리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이라고 하게 될 때는 손해보는 자리에 선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돼요. 선은 손해보는 자리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결국은 내가 공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 하늘 대신해서는 손해를 봐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하늘을 대신해서 손해보면 어떻게 하느냐? 그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갚아 준다. 이렇게 돼요. 그게 행복하다는 거예요. 사람이 갚아 주는 것이 아니라구요.

하나님을 대신해서 공적으로 손해보게 될 때는 무한한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지금도 창조적인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그 손해본 것에 대해서 선의(善意)의 손해배상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악의(惡意)의 손해배상을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선의의 손해배상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열을 손해보면 열로서 열매맺히는 것이 아니라구요. 반드시 그것은 열이 백으로서 열매맺힐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한데, 이 시간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불행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요 시간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더 높은 것은 공적인 것을 통해 들어온다

여러분 중에 기도를 해본 사람들은 대번에 알아요.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은 언제나 더 높아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욕심 많은 사람의 기도를 자꾸 이루어 주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거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욕심 많은 사람이 자꾸 기도한다고 해서 자꾸 이루어 주면 뭐가 될 것이냐? 그거 다 주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그 주는 것은 자기를 위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적인 것을 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심 많은 사람이 공적인 것을 받아 가지고 공적으로 쓸 수 있겠느냐? '없다' 할 때는 암만 기도해도 안 준다는 거예요. 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들 가운데 '기도를 암만, 뭐 몇 십년 해도 하나님은 내 기도 안들어 주더라' 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복을 주고 축복을 해주는 것은 개인적인 것으로 안 주는 거예요. 개인적인 것으로 줄 걸로 알아요? 높은 것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 높은 것은 공적인 것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공적인 것을 주려고 하는데, 이 욕심꾸러기가 공적인 것을 받아 가지고 이걸 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 그걸 보기 때문에 암만 기도해도…. 그렇기 때문에 선한 자리에 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면 부모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 끼리끼리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좋은 것이 있으면 '이것은 네 거다' 하면서 자꾸 주려고 합니다. 좋은 것은 자기 아들딸이 있으면 아들딸에게 주려고 하고, 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본래의 사랑의 원칙입니다. '아이구. 좋은 것은 내 것이다' 한다면…. 만약에 부부끼리 산다고 할 때, 남편이 '여편네 가진 것은 전부 다 내 것이다' 해 가지고 무슨 뭐 반지 같은 것이 있더라도 '여편네 장속에 넣어둔 것은 전부 다 내 것이니까 내 장속에 넣자' 그렇게 몇 번만 해보라 이겁니다. 있더라도 없다고 감추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것을 보다 중요시해야 합니다. '아이고, 내가 이것은 정말 써야 할 텐데, 공적인 것에 써야 할 텐데, 이거 이렇게 안 하면 전체가 피해를 입을 터인데…' 하게 되면, 배달하지 않더라도, 내가 나눠 주지 않더라도 벌써 다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도 바쁘게 이루어 준다구요. 하나님도 바쁠 게 아니예요? 그것이 한번 꽝하는 날에는 전체가 말려 들어간다 할 때는 하나님도 바쁘게 대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도와 주었다고 해서 자기 자체가 소모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신 그 공적인 물건 앞에 자기 것을 더 첨부해 가지고 밑천 까지 털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 밑천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 보라구요.

하늘 앞에 충효의 도리를 남길 수 있는 자

여러분, 선생님 주의가 그런 주의라구요. 내가 공적인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빚을 지더라도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못 하겠다고 생각 안 해요. 빚을 지더라도 해야 된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제나 다 해결돼요. 그런 것을 많이….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큰 문제를 중심삼고 자기가 대책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심각한 자리에서 '저 사람들이 저렇게 되면 안되겠다' 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빨리 방지하기 위해서 조급한 마음을 갖고 '이럴 때는 하나님도 얼마나 바쁘실까?' 하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바쁜 일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정지시켜 버리고, 하나님까지 염려시키지 않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이 효의 마음이요, 충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식을 가진 부모가 있으면 자식이 잠잘 때라도 몰래 뭘 갖다 놓는 거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살살 눈치 봐 가지고, 뱀장어 새끼 모양으로 편리하면 대가리를 쏙 내밀고 꽁지를 내밀어서 싹 빠져나가려 하고, 불리하면 꽁지고 대가리고 쏙 들어가려 하면 안 된다구요. 그것은 임시방편은 될는지 모르지만 하늘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구요. 그러다가는 결국 꺾여 나간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대인관계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잘해야 되는 것입니다. 공적인 것은 공적으로 소화시킬 수 있어야 됩니다. 공적인 것을 관리해 가지고 자기가 거기에서 이익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관리해 가지고 자기 자신이 손해보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충의 도리와 효의 도리를 하늘 앞에 남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래 가지고 망하는가 보라구요.

여러분이 자식들을 두고라도 한 번 시험해 보라구요. '아이고, 우리 마누라 성격은 요렇고 내 성격은 요런데, 거기에서 나쁜 성격은 요런 성격이고, 좋은 성격은 요런 성격이니까, 내 좋은 성격과 부인의 좋은 성격을 합한 좋은 면만 딱 닮아난 아들딸이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려면 그럴 수 있는 부모의 성격이 되어야 된다구요. 나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하게끔 눌러 놓는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그러면 좋은 것만 닮은 자식을 낳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은 공적인 면을 위해서 사는 사람을 참 사랑한다는 것을 각 분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각 분야에서…. 뭐 하나님이 있다 없다 물어 볼 필요도 없다구요. 각 분야에서 체험할 수 있어요. 그런 마음 가지고 나아가게 되면 하나님은 언제 벌써 다 준비해 가지고 앞을 다 가려 주더라구요. 여러분이 이런 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욕심이 누굴 위한 욕심이냐? 나를 위한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은 욕심, 이것은 언제나 좋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잘 때나 밥 먹을 때나 어디고 무사통과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제한이 없는 것입니다. 오르고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승일로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개재해 가지고 이러고 저러고 할 때는 문제가 클 것입니다.

손해본 것을 무엇보다 달갑게 소화시켜 나가야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도 나타나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오래 못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그 사람은 반드시 실수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여러분이 준비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인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정을 이어받아 연결시킬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손해를 보시는 것입니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을 대해 가지고 손해를 보는 자리에 있지만, 손해배상을 청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부모의 마음이예요. 만일에 열 번 잘못해 가지고 회개한 것을 하나님이 용서했으면 '야, 내가 열 번 용서했다' 하며 치부(置簿)해 가지고 '야, 너 영계에 온 것은 내가 열 번 용서해 줘서 온 것이니 너는 기쁘게 살 수 없다' 하며 장사하는 하나님이라면 어떻겠어요? 수없이 용서해 줬지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잊어버린 그 부모를 만난 아들의 자리에 섰기 때문에, 그 아들은 자기의 과거를 잊어버리고 행동할 수 있기 때문에, 행복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가 회개할 때 아이구 눈물 콧물 다 흘리고 했는데, 그 창피한 것을 전부 다 생각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운 그 무엇을 느낄 수 있겠어요? 다 잊어버리는 부모이기 때문에, 그런 티가 없기 때문에 그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 뭐 세상에도 그래요. 형제끼리 돈 십원 가지고 싸우는데, 그런 형제 두고 보라구요. 돈 때문에 싸우다가 나중에는 서로서로 생명을 걸고 싸우는 놀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형제끼리 밥 한끼 안 먹으면 어때요? 국수 한 그릇 안 삶아 먹은 것으로 알고 넘어가게 되면…. 그렇게 극복하는 사람은 형제 중에서 제일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열 형제가 있으면 열 형제 중에 아홉 형제끼리는 전부 다 싸우는데 한 사람만은 그러지 않고 참아 넘어간다면 그들의 모든 비밀은 전부 다 참고 넘어가는 그 사람 앞에 갖다 보관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지내고 보면 자기들의 비밀을 전부 다 아니까 큰소리 못 하는 것입니다. '형님, 뭘 그래요?' 하고 한마디 하면 '어-어-' 그러고, 또는 '야, 이 녀석아. 뭘 그래?' 하면서 동생에게는 얌전하게 대하는 겁니다. 재료를 다 제공했으니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완전히 지배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요렇게 해줬으니까 그건 도로 갚아야 돼' 하면….

여기 통일교회 문선생은 돈을 쓰고 수첩 같은 데다 기록 안 했어요. 옛날에는 사람들이 참 이러길 잘 했어요. 한 푼도 그저 기록했어요. 선생님은 이 뜻을 알고 가는 길에서는 돈을 썼다고 해서 무슨 장부 만들어서 기록하는 것 참 싫어하는 성미예요. 지장이 많아요. 그걸 기록하고 다시 한 번 기억한다는 것은 무한한 신앙의 발전에 있어서 상당히 지장이 많다는 것을 느꼈어요. 뭐 그렇다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예요.

하늘은 값없이 주고 값없이 잊어버리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갖고 나가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한 번 해보라구요. 절대 망하지 않는다구요. 선생님이 일생을 통해서 그런 경험을 참 많이 했습니다. 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을 잡아내 가지고 사지에 내몰면 사지에 내모는 사람이 죽으면 죽었지, 죽으라고 내몰린 사람은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약속을 했으면 손해보는 것을 무엇보다도 달갑게 소화시켜라 이겁니다. 그런 사람은 인격자로서 환경의 추대를 받는 것이며,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찾으시는 거예요. 눈이 새빨개 가지고 도도해 가지고, 뭐 마음이 편안치 않아 가지고 밸이 꼬여서 뿔뚝뿔뚝하는 사람들은 사람도 싫어하는 거라구요. 사람도 싫어하지요?

하늘은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요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주류적인 사상은…. 신앙길이란 것은 일시적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주류적인 중심을 남겨야 됩니다. 사람을 대하게 될 때도 하나님이 취해 나가는 주류적인 방향을 흡수 해 가지고 여기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떨어지라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런 사람이 좋은 거라구요. 뭐 하나 척 얘기해 주면 천년 가더라도 그 입에서 털어져 나가지 않는다구요. 틀림없다구요. 뭐 무슨 명령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야야 요건 너한테만…' 국가 비밀도 그렇다구요. 1급 비밀 같은 것도 자기 여편네라고 해 가지고 '당신은 내 사랑하는 여편네니까 요걸 이야기하니 딴 사람에게는 얘기하지 말라' 하면 그 여편네는 '아이구, 내 어머니니까 이것을 얘기하니 어머니는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말라'고 그러고, 그 어머니는 또 아들에게, 아들은 또 전부 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차라리 얘기 안 해주는 게 낫습니다. 암만 울고불고 앵앵하더라도 안 해주는 것이 낫다 이겁니다.

하늘의 비밀이 밝혀지는데 지금까지 왜 6천년 동안 걸렸더냐? 사람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한 사람이, 그러한 책임을 질 수 있는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알겠어요?「예」 여러분, 선생님은 기도할 때'아, 하나님이 약속했는데 왜 안 이루어 줘요? 아이구, 뭐 하나님도 별것 없다' 하지 않아요. 안 이뤄지는 게 아니예요.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런 말 한다고 해봐요.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이루어 주고 있다구요. 그것이 여기서 이루어지느냐,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거라구요.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 뭐 하늘의…' 한다면, '이 녀석, 뭐야?' 하며, 이중의 채찍을 맞는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세계를 위해 뛰어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세계를 위해 일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뭐 방안에서 일해요? 세계를 위해서, 내가 지금 세계를 위해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곳에서든 이루어져 오는 것입니다. 이루어서 오는 그 길이 없으니 그 길을 닦는 거예요. 길을 닦아 오는 것입니다. 일방에서 길을 닦아 오는 것입니다. 이걸 갖다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길을 닦는데 하루에 해주면 그것밖에 없어요. 그것 가고 나면 끝이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은 땅 끝에서부터 나를 향해서 길을 닦아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일이 걸리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실이 그렇다는 거라구요.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데, 결국은 이루어졌다 하는 일이 많더라구요. 요건 뭐라고 할까요? '아버지…' 하고 아침에 기도하고 나서 점심 때에 가서 '기도했으니 좀 주소' 한다면, 먹는 밥은 줄 수 있지만 나라를 움직일 수 있는 대임(大任)은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루어 주고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다가는 태풍이 와서 이걸 왕창 깨뜨려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녀석!' 하며 이루어진 것까지, 준 것까지 첨부해서 탕감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뜻을 대해 가지고 중심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이 한 번 걸리는 날에는 용서를 못 받았어요. 보라구요. 어디 용서를 받았나요? 용서를 못 받았다구요. 딴 사람들은 용서를 받았지만, 책임진 사람이 잘못되면 용서 없다구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을 중심삼은 생활에서 이러한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두고 볼 때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하는 확인이 필요하다구요. 내가 지금 하늘로 올라가느냐, 땅으로 내려가느냐? 땅으로 내려가면 어디로 내려가느냐? 땅으로 내려가는 것은 인간을 위해 내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오르락내리락할 길은 그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 전통을 중심삼아 가지고 추구해 가는 길,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인간을 위해서 사랑하는 길, 그것이 하늘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곳이예요. 그 외의 길은 없다 이겁니다. 이 자리를 잡고 나가게 될 때는, 그 사람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늘은 그런 사람과 같이하기 마련입니다. 이게 문제예요. 이게 제일 여러분의 생활의 문제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공적인 입장에서 판단하라

오늘날 통일교회 잘 믿는다는 사람, 뭐 영계를 통하느니 뭐 하느니 이러지만,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빵점이예요, 빵점. 하나님을 대해 가지고는 밥도 굶고 뭐 하지만, 사람을 대해 가지고는 속을 빡빡 긁어 가지고 그 사람이 눈물을 깨깨 흘려야 '야, 시원하다' 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이 가서 사는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따라가라구요. 그거 천국이겠어요? 그거 큰일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 분야에 있어서 여러분이 그런 소양을 갖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앙자의 약속은 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약이예요, 공약. 일생에, 천년 만년 가더라도 변할 수 없는 지조를 지켜 나가야 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는 여러분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종적, 횡적 자리를 통해 가지고 그 중심의 자리에서 횡적인 문제를 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 산다는 거예요. 이렇게 본다면 (칠판에 그림을 그리시면서 말씀하심) 요것이 앞뒤로 똑같은 거리인데도 나라는 것은 저 뒤에 서서 조정해야 언제나 기준이 맞게 되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이게 주고받으면, 이것이 하늘 되면 이것은 벌어지게 마련이죠? 그렇지요? 이것이 요렇게 싹 내려 붙으면 이와 같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요것이 이렇게 되고 요것은 이렇게 되어, 오른쪽은 하늘이요 왼쪽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수직과 같은 그 기준, '나는 이렇게 산다' 하는 걸 정해 놓고, 그 다음에 이것을 각도에 따라서 조정하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고 내가 지금 어떠한 사람이니까 이렇게 대해 주면 좋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보고 있으니까 이렇게 대해 주면 좋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일 판정이 틀리더라도 그것은 공적인 기준을 통해서, 공적인 것을 사랑하는 기준을 통해서 판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 판정에는 아무런 참소조건이 없다, 이렇게 돼요. 그렇지만 거기에 자기가 들어갈 때는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이 들어가게 될 때는 용서없이 탕감받아야 됩니다.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거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이와 같은 위치에서 하늘을 대신해 가지고 판정을 하게 될 때는, 그 판정이 만일에 그릇되더라도 자기가 걱정 안 해도 돼요. 틀림없다구요. 그렇지 않아요? 세상에도 그렇지 않아요? 법관이 형법이면 형법을 중심삼아 가지고 사형선고를 내렸을 때, 그가 사람 죽인 것을 책임집니까? 그도 사람을 죽였다구요. 사람을 죽이긴 죽인 거라구요. 죽인 사람을 사형시켰으니, 죽인 사람을 또 죽이는 자리에 서니, 재판장이 죽인 자리에 선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법에 의해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은 안 걸린다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자기 탕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개재 되어 들어갈 때는 더 큰 죄값을 받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영계에 가 가지고 그 법에 적용돼요. 그렇게 공판하던 판사가 있으면 그는 영계에 가 가지고…. 자기의 이익을 중심삼고 삿(邪)된 관점에서 했다면 대번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법관의 자식은 3대 이상을 못 갑니다. 끝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게 무서운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어요. 잘못하다가는 걸려드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부흥강사의 아들딸이나 유명한 목사의 아들딸들이 불량자가 되고 명동 같은 데 들어와 가지고…. 깡패 소굴에 있어서 그 중의 3할 이상이 잘 믿는 목사나 장로의 아들이라는 평가를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늘의 뜻을 위해서 공적인 일을 안 하고, 자기가 개재해 가지고 놀음놀이를 했기 때문에 반드시 배가의 심판 환경이 그의 목전에 나타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무정하고 제일 무서운 자리가 공적인 자리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더우기나 신앙길이란 것은 만민을 다루어야 할, 만민의 생사 문제를 다루어야 할 지극히 두려운 길입니다. 여기에 들어와 가지고 은혜가 없고 자기 세계가 어떻고 하게 되면 이것은 일족뿐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팔족을 멸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렇게 걸려드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여러분이 모르는 이 주변에서 선민사상을 중심삼고 얽어져 나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신중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어요. 뜻이 아니라 할 때는 모가지를 잘라도 안 간다는 것입니다.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뜻이다 할 때는 세상이 뭣이라 하더라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적인 자리에 선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인 것을 알고, 우리들의 자세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 다는 것을 잘 파악해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신앙의 문제를 중심삼고, 대인관계를 중심삼고, 환경에 있어서 좋고 나쁜 문제를 속단하지 말고 이러한 공적인 문제로 판단하게 되면, 여러분은 망하는 세상에서 망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요, 흥하더라도 그늘진 곳에서 흥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햇빛을 바라보고 상승하는 발전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여러분의 생애를 한 번 반성해 보라구요.

나는 어떻게 살아왔느냐?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오늘 이전의 과거는 어떻게 살았느냐?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 것이냐? 요 원칙에 어긋나게 될 때는 빨리 시정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우치기를 바라서 말씀드렸어요.

​기 도

​아버님, 1972년 7월 이후의 이 기간에 저희들이 갈 섭리를 중심삼은 숙명의 노정 위에 당신의 사랑이 언제나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먼저는 뜻이 저희들에게서 떠나서는 안 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아버님을 떠날지라도 아버님은 뜻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대하고자 하는 통일의 무리들 위에서, 아버님이여, 떠나지 마시옵소서.

뜻이 먼저 앞서고 우리는 따라가야만 되겠습니다. 자기가 앞서서 뜻을 끌고 가려 하는 사람은 가장 위험한 자리에 서는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더우기 통일교회의 책임을 짊어진. 혹은 중요한 직책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의의 행동을 하다가는 파탄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공적인 것이기 때문에 공적인 연유를 통하지 않고 행동하다 가는 공법에 걸리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우리의 자세가 이렇게 중요한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의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은 나 혼자의 인연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를 넘어 가정이 여기에 엉켜 있고, 가정을 넘어 국가가 엉켜 있으며, 국가를 넘어 세계가 엉켜 있는 동시에 거기에 평면적인 세계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무섭고도 어마어마한 자리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따라 오늘의 현실적인 생의 가치를 타진하는 역사적인 여건들이 내 주위에 둘러쳐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 가정이 나의 심판장이 되는 것이요, 이 나라가 나의 심판장이 되는 것이요, 이 세계가 나의 심판장이 되는 것이요, 온 영계가 나의 심판장이 되는 것이요. 아버님이 나의 심판장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앞에 있어서 저희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꿀리는 자리에 서지 않는 당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공적인 입장, 가정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어느 한때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통일사상이 지향하는 것은 나보다도 공적인 입장에 선 가정을 추대하라고 했고, 가정보다도 나라가 공적인 자리에 섰기 때문에 나라를 모시라고 했고, 나라 위에 세계가 있기 때문에 세계를 위해 희생하라 했고, 세계 위에 온 영계가 있기 때문에 그 영계와 하나되라고 했습니다. 그 전체의 주체 되시는 아버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최후에는 아버님의 사랑까지 결속해야 되겠기 때문에, 우리는 희생길과 죽음 길을 각오하더라도 감사하며 가라고 당신을 중심삼고 가르쳐 나왔습니다. 여기에 어긋나게 될 때는 그 어긋난 기준 이상의 것이 나를 심판할 수 있는 주인으로 남아지는 것을 생각하면서, 무섭고 두려운 자리인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나만을 중심삼고 가증스럽게 행동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가정을 등지고, 나라를 등지고, 세계를 등지고, 아버님을 등지는 비참한 자리에 서서 자기 자체의 행각의 노정을 망쳐 버리는 무리가 되지 않게끔, 아버님이여, 지도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통일교회 전통이 어떻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전통을 세우기에 지금까지 싸워 나온 아버님의 지도 방법을 저희들은 압니다. 아버지, 금후에도 아버지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것을 아옵니다. 여기에 서 있는 이 자식도 아니라는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것이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관리 보장(寶藏)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노력을 가해 가지고, 현재 처해 있는 자리에 어떻게 플러스 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생애에 남겨진 사명으로 알고 가는 자리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고 지금까지 통일교회는 싸워 나왔습니다. 생애를 바쳐 가지고 개척해 나왔습니다. 여러가지 사정도 많았고, 슬픈 사연도 많았지만 그 사연들이 슬픔의 결과로 말미암아 사망과 짝한 것이 아니라, 그런 슬픔의 조건들이 하늘의 생명을 촉구하고 내일의 새세계를 창건하는 데 있어서 원동력으로서 화해졌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어이 당신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까.

통일교회 역사 가운데 여러 가지 비참한 수난길이 있었지만, 그것이 수난길로서의 일방적인 결과에 봉착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후대에 올 사람이 그 수난을 겪은 선래의 사람들 이상의 사람들로 배양될 수 있는 정신적인 전통의 기준이 닦아진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님은 수난을 무엇보다도 귀한 선물로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이제 와서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통일교회 가는 길 앞에 핍박이 없었다면 무가치한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지도자 앞에 영어살이의 노정이 없었다면 무의미한 인연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역사들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뜻의 일념을 다짐짓기 위해서 그렇게 갔기 때문에 뜻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눈물로써 그 길을 되찾고 눈물로써 그 길을 더듬어 계승해 나가겠다며 여기에 연결되고자 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이러한 무리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았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는 공적인 분야에서 희생하라고 오늘도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도 그러해야 되겠습니다. 이 움직임이 교회를 거쳐서 나라를 거쳐서 세계의 도처에까지 발전하더라도 그 노정을 여실히 세계의 종말시대까지 몰고 나가지 않으면 통일교회에 종말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뜻이 귀한 줄을 알았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에게만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에, 이 길로 내몰아야 했고, 이 길로 다짐지어야 할 생활을 같이 넘겨야 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또한 핍박의 길, 수난의 길로 내몰았고, 한스러운 길을 행복의 터전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자동적이요, 능동적인 무리가 돼야 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금후에 어떤 길이 있더라도 저희들은 가기를 결심하였습니다. 어떠한 곳이라도 머물기를 결심한 몸들이오니, 분부하시는 거룩한 뜻 앞에 슬픔의 조건을 남기지 않고 소망과 기대의 조건을 남겨 생명을 다하는 일이 있더라도 달려갈 줄 아는 믿음직한 통일의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고, 강하고 담대한 하늘의 병정의 모습을 갖춘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7월 20일 이후가 되었습니다. 이 기간은 저희들이 전통을 따라 개척전도와 이 나라를 대해서 싸워야 할 기간이오니, 이 기간에 뜻을 위하여 일선에 서서 싸우는 당신의 어린 아들들과 어린 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적인 때를 대해서 성화의 봉화를 들고 새로이 나타난 세계의 십자군, 아버지여, 평화의 십자군을 아버지께서 지키시어서 이들이 가는 곳곳마다 당신이 살아계심을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보이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죽었다고 하는 이 비참한 현세계 정세를 바라보면서 아버님이 살아 있는 실재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그들 앞에 증거시키어 그들을 당신 앞에 굴복시킬 수 있는 일이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악이 팽창하는 이 환경을 선으로서 소화 흡수할 수 있는 주체적인 역량을 지녀야 할 무리가 통일교회 역군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저희들은 강하고 담대해야 되겠습니다. 주류사상에 일체가 되어가지고 부동해야 되겠습니다. 철두철미한 전통적 기원을 따라 가지고 일방통행을 하더라도 사방을 거느릴 수 있는 일방인 것을 느낄 줄 아는 무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하루는 거룩한 날이오니, 당신의 이름을 갖고 모이는 곳곳마다 친히 같이하여 주옵소서. 측은하게 여기시는 사랑을 가져 가지고 동역자가 되시옵고, 협조를 해주셔서 내일의 승리의 상속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뜻과 더불어 승리의 세계가 어서 오기를 바라면서,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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