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버님, 오늘은 1972년 5월 21일, 이달을 맞이하여 세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에 모인 자녀들 위에 당신의 영광이 임하시옵소서.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평화와 새로운 통일의 세계를 뜻하시는 대로 성취하시옵소서.
여기에 모인 어린 자녀들은 몸 마음을 다 바쳐 당신이 원하시는 뜻 앞에 새로운 제물로서 완전히 바쳐지기를 맹세한 무리들이오니,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받으시옵소서. 영광의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백성이 되고 자녀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이곳을 우러러보면서 머리를 숙이는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삼천리 반도에 널려 있는 자녀들은 물론이지만, 해외에 널려 있는 수많은 어린 자녀들도 이곳을 마음의 본향으로 그리워 하고 있사오니. 눈물어린 심정으로 당신을 그리워하고 당신의 승리의 나라를 그리워하는 곳곳마다 무한하신 자비와 승리가 같이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아침에 저희들에게 새로이 분부하여 주시옵소서. 본국에 돌아와 두번째 맞는 이 안식일이 당신 앞에 기쁨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역사적인 계획 밑에서 새로운 운동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저희들의 사명인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일체를 당신의 뜻 가운데서 시작하고 당신의 경륜 가운데서 귀결되게 하여 주실 것을 바라옵니다.
인간만 가지고는 크나큰 뜻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아옵니다. 역사를 통해서나 시대를 통해서나 미래를 통해서나 이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당신이 여기에 개재하지 않고는 승리의 과거가 없었고 현재가 없으며 미래가 없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먼저 하늘을 위주하고 하늘의 뜻을 바라보면서, 일체를 뜻과 더불어 수습하고 일체를 뜻에 순응하고 일체의 소망을 뜻에 귀결시키는 생애를 사는 거룩한 무리들이 이 땅 위에 많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 당신의 뜻이요 소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타락된 인간은 당신과 먼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한스러운 복귀의 길, 탕감의 길을 걸어 다시 당신의 품에 품기지 않으면 안 될 불쌍한 무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무한하신 당신의 능력과 무한하신 당신의 자비와 사랑만이 저희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불쌍한 것들을 그냥 그대로 두지 마시옵고 찾아오시어서 저희의 마음을 일깨워 주시옵고, 본성의 심정을 일깨우시어 당신을 그리워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존귀하신 그 모습을 흠모하고 사모할 수 있게 저희의 마음을 일깨워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랑하시는 당신의 모습 앞에, 어전에 불리움받은 자로서 당신이 분부하신 말씀 앞에, 생명과 모든 것을 바쳐 당신이 원하시는 뜻 앞에 완전한 승리의 제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가지고 이 아침에 모인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언제나 부족하고 언제나 미흡하고 언제나 미완성권내에 있는 저희들을 늘 채찍질하셔서 승리의 기준까지 가게 지도하여 주시옵소서. 만약에 미급한 자리에 머물러 있거든 채찍으로 쳐서라도 그 고개를 넘을 수 있게끔 아버지께서 인도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금번 세계노정을 통하여 어린 자녀들을 사방에 헤쳐 놓고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나라를 위하여 싸우게 했사오니, 그 자리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만나기를 고대하고 만났다 헤어지는 그 곳에는 당신을 중심삼고 그리움이 연결되어, 당신을 그리워하고 당신의 뜻 혹은 말씀에 따르고 노래로 아버지 앞에 찬양하는 무리가 불쌍하고 죄악된 이 땅 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역사적 슬픔을 품고 오시던 아버님이시여, 위안받으시옵소서.
젊은이들이 아버지 앞에 생명을 각오하고 나서는 곳곳마다,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소망의 세계가 싹터 오는 것을 희망으로 삼으시사 언제나 가는 길에 협조하여 주시옵고, 당신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드러내시어서 만민 앞에 혹은 만방에 당신의 승리를 떨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누구를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옵니다. 누구 때문에 부름받은 자들이 아니옵니다. 오로지 아버지를 위하고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서 부름 받은 자요, 태어난 모습들이옵니다. 뜻 앞에 기쁜 승리의 날을 다짐할 수 있는, 당신이 자랑하고 역사노정에 남아질 수 있는 하늘의 용사가 되기 위하여 부름 받은 몸들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선의 노정에서 싸움의 길을 걸어왔사옵니다. 금후에도 또다시 저희들은 이 길을 달려가고자 하오니, 외롭거나 슬픈 곡절에 부딪치더라도 당신만이 저희들의 중심이요, 저희들의 표준이요, 흑암의 세계에서 광명의 등대로서 늘 빛을 비춰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진실로 바라옵니다.
아버지, 부족한 저희들의 모습을 살피시옵고, 선한 마음 앞에 일치되지 못한 죄악의 뿌리를 제거시키시옵고, 당신의 불꽃같은 능력으로 저희의 심정을 통찰하시옵고, 최후의 승리의 모습을 다시 빚어낼 수 있게끔 현현하시어서 관찰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구라파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대표하여 이번에 여기에 와 있는 22명의 당신의 자녀들과 같이하시어서 지켜 주시옵고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이 전국을 순방하면서 일으켜 놓은 모든 움직임이 당신 앞에 수습되고 당신의 승리의 터전 앞에 보탬이 될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날이 거룩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죄악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일생을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최후에, 즉 임종시에 자기의 생애를 반성해 볼 때 자기가 얼마나 선하게 살았는가를 생각한다면, 선하게 산 것보다 선하게 살지 못한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일생에서 선한 일과 악한 일을 하나하나 빼낸다면 최후에 남은 것이 선이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소망이지만, 선보다는 악이 남기 쉬운 것이 우리 인생의 행로가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시대의 수많은 인류를 총합해 볼 때, 개인 개인의 선과 악을 제하고 나면 선보다도 악이 남아진다고 본다면,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고, 또한 이 사회는 선한 사회가 아니라 악한 사회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을 두고 기나긴 인류사를 관찰해 보더라도, 개인 개인이 연결 되어서 이루어진 것이 역사인데, 그 역사노정에 있어서 참을 이어받아 가지고 참의 역사가 되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참보다는 악이 남아져 가지고 악의 역사가 이어 나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선한 세상이 아니라 악한 세상이라고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하게 되었느냐? 선이 먼저 출발해서 선의 씨를 심었더라면, 심어진 대로 거두어지므로 선의 결과가 반드시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이 심어진 것이 아니라 악이 먼저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선한 바탕 위에 악이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악한 바탕 위에 악이 심어졌다면 그건 악만으로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선한 바탕 위에 악이 심어졌기 때문에 선한 면과 악한 면이 뒤넘이치면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선한 바탕 위에 악이 심어졌기 때문에, 최후에 남아지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이 남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전체를 미루어 봐서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악의 지배권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이 전체를 주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이 주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악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악할 수밖에 없지만, 만일 선한 절대자가 계시다면 그 절대자는 어떠할 것이냐? 혹은 절대자가 있는 반면에 그 절대자를 반대하는 악한 사탄이 있다면, 그 사탄은 어떠한 존재냐?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만은 절대적인 입장에서 선해야 될 것입니다. 그분은 처음도 선해야 되고 과정도 선해야 되고 끝도 선해야 될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걸어온 과거도, 섭리를 추진시키는 현재도, 미래도 그분에게 있어서는 선과 악이 합한 모습이 아니고, 혹은 선과 악이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있어서는 선만이 남아지는 것이고 악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반대적인 사탄이 있다면 그 사탄은 어떠한 존재냐? 그에게 있어서는 선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출발부터 악한 것이요 과정도 악한 것이요 결과도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만일 사탄이 선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면, 우리 인간이 선한 길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혼선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악은 어디까지나 악한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작도 끝도 사탄은 악해야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한 하나님과 그 반대적인 악한 사탄 둘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두고 내가 선을 추구하며 가게 될 때는 선하신 하나님이 같이하는 것이요, 그 반대에 서게 될 때는 악한 사탄이 같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일생노정에 있어서 선하신 하나님을 그리워하면서 선만을 남길 수 있는 그 길을 어떻게 세워 나가느냐 하는 것이 인간이 무엇보다 희망하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선하신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악한 편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선을 중심삼고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 인간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그분과 하나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서만이, 우리 인생행로가 선으로 시작되고 선의 과정을 거쳐 선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다 살고 나서 선과 악을 하나하나 제하고 났을 때, 악이 선보다 많게 되면 악한 주관권내에 귀결되는 것이고, 선이 악보다 하나라도 더 남아질 때에는 선한 주관권내에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이냐? 악한 분야를 방지하고 선한 분야를 생애노정에 남기려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 믿고 나가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희망이 무엇이냐? 완전히 선한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 '하나님의 온전함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습니다. 절대적이요 선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진정코 사랑하기를 바란다면, 그 사랑의 대상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 인간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상대적인 존재로서 선한 존재로 서는 것을 최고로 바랄 것이 아니냐. 그 상대적인 존재가 악한 입장에 서 가지고 신음하고 사탄 앞에 참소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 선한 주체로서 소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은 두말할 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선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완전한 대상적인 선의 실체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태어나면서부터 그러기를 바라느냐? 물론 그럴 것입니다. 또, 태어나 가지고 일생 동안 그렇게 살기를 바랄 것이냐? 물론 그럴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랬지만, 미래에 있어서도 선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일생 동안 선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이 아니냐. 현재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인간들을 대해서도 선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냐. 현재와 미래도 그렇다면 과거도 그랬기를 소망하셨던 하나님임에 틀림없을 것이 아니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에 하나님이 선한 터전을 남기기 위해 노력한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한 이후에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스스로 악을 제거시켜 버리고 선한 입장을 결정지어 선한 자리에 나가야할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 자체로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선의 주체되시는 하나님이 여기에 개입해 가지고 하나님과 아담 해와와 연결할 수 있는 하나의 선의 기준을 결정지을 수 있는 그 자리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정되는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그 자리는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소망기준을 중심삼고 결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또 자라서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인데, 인간이 바라는 그 행복의 최고의 중심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부모로 모실 수 있는 아들딸의 입장으로 아담 해와가 지음받았다면, 부모 앞에 아들로서 최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그 자리가 아담 해와가 바라는 최고의 희망의 자리일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사랑한다면 아담 해와는 어떠한 자리에서 사랑받고 싶겠느냐? 혹은 최고로 희망하는 자리가 어떠한 자리냐?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딸로서 사랑받을 수 있는 자리일 것입니다.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냐? 완전한 사랑입니다. 아들로서 딸로서 완전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타락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일생 동안 완전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그 자리를 완성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다면 아담 해와는 절대적인 하나님을 부모로 모셔 가지고 자식으로서 일생 동안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완전한 사랑을 받았다면 사랑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완전한 출발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출발을 해야 할 우리 인간시조가 그걸 하지 못하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완전한 사랑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 인간을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못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후회 혹은 슬픔의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 때문에 슬픔의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고 우리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님이 계획한 일도 절대적인 결과를 가져와야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결과를 못 가져왔고,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출발을 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타락된 인간으로 말미암아 그 출발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기필코 성사시키지 않으면 절대적인 하나님으로서의 권위와 위치를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러한 기준을 다시 찾기 위해서 어려움을 극복하며 나오지 않을 수 없다고 우리는 여기에서 결론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한 출발을 보지 못한 것이 타락입니다.
그러면 아들로서 완전한 사랑을 받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완전한 부부로서 사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태어나기를 남자로 태어났고, 해와는 태어나기를 여자로 태어났습니다. 이들이 타락했으니 말이지 타락하지 않고 완전한 사랑을 받는 자리에서 성숙해 가지고, 즉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나고 자라고 그야말로 하나님의 완숙한 사랑권 내에서 성숙했다 할진대는, 이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부로서 완전한 사랑권내에서 출발을 보았을 것이 아니냐. 이것은 두말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 부부는 불행했을 것이냐? 아닙니다. 그 부부야말로 절대적인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그 부부가 하나되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은 상대적인 입장에 서 있는 아담 해와는 그야말로 행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갖고 있는 물건은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그들의 물건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기쁨은 하나님만의 기쁨이 아니라 상대적인 존재의 기쁨도 되기 때문에,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기쁨은 아담 해와와 기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아담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해와의 기쁨이 되고, 아담의 기쁨이 해와의 기쁨이 되고, 해와의 기쁨이 아담의 기쁨이 되고, 아담 해와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는 그야말로 통일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어떤 면에 있어서라도 서로가 부족함이 없고 치우침이 없이 충만된 사랑의 면을 갖출 수 있는 자리가 완숙한 부부로서 사랑받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는 그러한 출발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타락이 가져온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다음에는 부모로서 완전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부모가 자식을 낳더라도 자식으로서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부모가 완전한 사랑을 체휼했다면 자식에게도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을 체휼하지 못한 입장에서 자식을 낳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들이 체휼한 이하의 사랑이지 그 이상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참된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할 수 있는 자식을 사랑해 봤느냐 하면 사랑해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서도 부모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의 부모들도 생명을 잃으면서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타락의 사랑으로 인연된 그 부모도 생명을 희생하면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볼 때, 타락하지 않고 완전한 자녀로서 완전한 부부로서 완전한 부모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아 가지고 자식을 낳았다면 그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얼마나 강했을 것이냐? 그것은 완전한 기준이기 때문에 강하다면 최고로 강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사랑을 밀어제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랑 앞에 하나님도 눈물을 흘리고 그 사랑이 없으면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절대자도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상대적 요건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서적인 분야를 제거시킨 행복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완전한 상대적 요건을 갖추어 가지고 주고받는 정서적인 기반을 연결시키게 되면 여기에서 사방성이 자기와 관계를 맺게 되지만, 상대적 요건이 갖추어지지 않게 될 때는 고독한 것입니다. 고독에는 만족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부자의 관계를 맺어 가지고 횡적으로 자녀가 되는 역사가 벌어졌다면, 그 역사는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되었을 것이냐? 그렇게 되었더라면 종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 하나님과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연결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종적인 사랑이 다시 부모를 중심삼아 가지고 횡적으로 자기 후손에게 연결되는, 즉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된 자리에서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 서 가지고 횡적으로 자녀를 사랑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 자녀에 대한 자리도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아담 해와를 통해서 그 자녀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 자녀의 사랑은 자녀의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녀의 사랑은 부모를 통해서 인연되기 때문에 그것이 부모 앞에 돌려드리는 기반이 되었다면, 그것은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사랑을 중심삼고 이상적인 사위기대인 것입니다, 사위기대.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분에게 사람이 필요하냐?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가 지었느냐? 하나님이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사람을 얼마든지 지을 수 있는 능력의 주체자입니다. 이걸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사람 그 자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질이 필요하냐? 물질도 하나님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을 필요로 하느냐? 사람 자체는 필요하지 않으면서 왜 필요로 하느냐?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그 사람이라는 것은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다른 목적이 있어서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물질이 필요하겠어요? 권력이 필요하겠어요? 하나님에게는 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니만큼 그의 권한을 능가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존재세계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은 권력도 아니요 돈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지식이 필요해요? 필요한 것은 지식도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을 왜 지었느냐? 사람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보면 뭐 훌륭한 것이 있어요? 얼굴이 어떻게 보면 이상 야릇하게 생긴 것이 인간이라구요, 한번 보게 되면. '왜 저렇게 생겼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걸 보고 미칠 수 있는,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의 모습을 좋아해서 지은 것이 아니라구요.
그럼 왜 지었느냐? 자기 속에서 상대를 갖추어 가지고 작용을 하고 자극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그 무엇을 느끼기 위해서 지은 것입니다. 그 외에는 이미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사랑의 감정을 유발시킬 수 있는 대상의 실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사람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속에는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이상의 아름다움이 없을 정도로 다 갖고 있습니다. 자기 자체보다도 그러한 내성적인 것을 상대에게 반영시켜 여기서 반응되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범위가 넓은 이러한 사랑의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서 사람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과 먼 곳에, 땅 끝과 끝에 갈라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갈라진 것이 아닙니다.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사랑이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갈라지면 갈라질수록 가까와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기에 거리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에서만이 거리를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한한 하나님,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이 그 무한권을 통할수 있는 소성(素性)이 무엇이냐? 능력이 아닙니다. 권세라는 것도 그 한계권을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한계권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사랑의 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한한 세계, 영원한 세계를 관리할 수 있는 그 본질은 권세가 아니요, 무슨 지식이 아닙니다. 사랑의 힘이 아니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하나님은 대상적인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인간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백성의 사랑으로 먼저 나타나느냐? 백성의 사랑으로 먼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구요. 형제의 사랑으로 먼저 나타나는 것도 아니라구요. 사랑이 나타나는 길을 추구해 볼 때, 사랑이 나타나는 맨 처음의 길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의 주체라면…. 우리 인간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절대적인 하나님이 참된 사랑의 전통을 세우는 데는 어떠한 전통부터 세워야 되느냐? 부모로서의 사랑의 전통을 먼저 세워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로서 아들을 사랑하는 전통을 계승하여 참된 사랑의 출발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완전히 사랑하고 자식으로서, 즉 아들딸로서 완전한 사랑의 인연을 맺기를 바랐을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냐? 그것이 이루어진 후에는 부부의 사랑을 맺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그 부부가 하나님을 닮아 가지고 하나님과 같이 기뻐할 수 있는 권을 가져야 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부모의 사랑을 갖추고 자식의 사랑을 갖추고 부부의 사랑을 갖추어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그들도 자녀를 품에 품고 사랑하게 될 때, 여기서 하나의 궤도를 갖추어 가지고 횡적으로 발전할 것이 아니냐? 이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로서 완전한 사랑을 해야 됩니다. 완전한 사랑을 받는 그 아들딸이 완전한 부부로서 사랑을 이루기를 하나님도 바라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을 이룬 다음에는 부모로서 사랑을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사랑하듯이 그 인간들도 자기와 똑같은 입장에서 자식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야 이것이 종횡으로 일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여기에서 비로소 같다는 것입니다. 즉, 종과 횡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 아니예요?
그렇게 되었다면 세상 어디에 행복이 있겠느냐? 인간을 떠나 미래의 세계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자기가 출발한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행복을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따라서 나가는…. 행복의 기준 앞에 보조를 맞추는 역사가 되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원칙의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그런 인간이라면 인간은 비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타락이라는 운명권내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될 입장에 떨어졌기 때문에, 어느 한때에 참의 기준을 추려서 재현시켜야 인간이 비로소 본연의 소망의 기준, 행복의 기준, 이상의 기준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복귀란 언제 이루어지느냐? 완전복귀는 역사시대에 있어서 끝날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끝날은 무엇이냐? 잃어버렸던 완전한 이상적인 사랑의 기준을 찾는 때입니다. 그 기준이 뿌려지고 심어져서 과정을 거쳐 결과를 이루었다면 그것은 어느 때나 언제나 하나님 앞에 대상적인 입장에 설 것인데, 그렇게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일치될 수 있는 곳, 일치될 수 있는 그때를 바라보고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이 완성을 볼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이 완성을 보게 될 때, 인간도 비로소 완성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타락한 인간, 떨어진 인간이지만 다시 복귀하는 완전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소망을 성취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기준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재현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소망을 두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 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기준을 갖지 못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이상적인 사랑의 근본 기준을 우리는 재현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일에 가능하지 않다면, 인류는 비참한 세상에서 비참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인류는 처음에는 비참하였지만 나중에는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로 태어 났으나 그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딸이 죽은 것입니다. 죽은 아들딸을 다시 살리고자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에, 부모인 하나님은 그들을 살려 놓는 운동을 해온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완전복귀, 완전복귀라는 것은 무엇을 중심삼고 말하느냐? 사랑을 중심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에서 생명이, 생명에서 소망이…. 그 소망 가운데서 우리는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사랑이 먼저냐 생명이 먼저냐 할 때, 생명이 먼저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무엇 때문에 창조했느냐? 그 아들딸의 생명을 보기 위해서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아들딸과 더불어 사랑을 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그 바탕에서 생명이 창조된 것이지 생명을 만들어 가지고 사랑을 유발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래 하나님의 마음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해서 생명이 시작하고 그 생명이 사랑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결과도 사랑으로 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시작이 사랑이었기 때문에 끝도 사랑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빼면 우리 인간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둘 이상,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태어났느냐? 사랑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다는 거예요. 이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대상을 백 퍼센트 위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야 사랑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사랑이 성립되는 데 있어서 '아, 내가 있어 가지고 나를 위한다' 하는 데서는 완전한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백 퍼센트 남을 위하는 자리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이예요. 알겠어요? 자기를 중심삼은 데서 사랑이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을 완전히 위할 수 있는 자리에서 완전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남자 여자는 누구를 위해서 태어났느냐? 남자는 누구를 위해서 태어났느냐? 남자가 남자를 위해서 태어났어요? 남자가 태어난 것은 남자를 위해서 태어났어요? 여기 김 전무, 몸은 뚱뚱해 가지고 말이야, 뭐 때문에 태어났어요? 여자 때문에?「예」 그렇게 태어났어요? 기분 나쁘잖아? 남자가 그렇게 태어난 것은 남자 때문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누구를 위해서 태어났느냐? 이렇게 내가 태어난 것은 절대적으로 누구 때문에?「여자 때문입니다」 김 전무, 정말 그래요? 얼마나 그렇게 생각해 봤어요? 이게 문제라구요. 남자는 절대적으로 여자를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인데, 이것을 모른다구요.
'남자들 가는 길에는 사랑이 있다' 자기의 사랑인 줄 알고 있다구요. 그런 것은 미친 놈이라구요. 그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남자가 남자 때문에 태어났다, 자기 때문에 태어났다 하는 녀석은 일생 백년 살더라도 없어지고 만다구요. 일세기도 못 간다구요. 죽으면 그만이예요. 그렇지만 '나는 여자를 위해서 태어났다' 하는 사람은 그래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자는 누구를 위해서 태어났어요? 여자가 태어날 때 여자를 위해서 태어났어요? 누구를 위해서 태어났어요? 여기 할머니들, 누구를 위해서 태어났어요? 남자를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겠다는 관념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사랑이고 뭣이고 다 없습니다. 생명을 위해서 태어났다 하지만 본질적인 우리의 생명을 추구해 볼 때, 자기를 위해 태어났어요? 남을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이걸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걸 볼 때 우리 인간은 사랑을 중심삼고 출발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완전히 남을 위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데에서 사랑이 성립되는 것이지, 나를 위해서 태어났다는 데에서는 사랑이고 뭣이고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부면 부부끼리 서로 위하는 데에서 사랑이 성립되지, '너는 나를 위해라' 하는 데서 사랑이 성립돼요?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그것은 상대의 기분을 맞추는 사랑이지 진정한 사랑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사랑의 이상을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어째서 좋은 것이냐? 아버지나 어머니나 혹은 학교에서 교육을 할 때에 전부 다 '너 착한 일을 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착한 일이냐? 나가서 남을 주먹으로 때려눕히는 것이 착한 일이예요? 남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하라는 것은 자기를 소모시켜라, 남에게 줘라…. 착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은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희생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사랑을 유발시킬 수 있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돼요. 그렇지요?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은 나라의 사랑을 유발시킬 수 있고,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은 가정의 사랑을 유발시킬 수 있고, 동지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은 동지의 사랑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모르지만, 남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종교는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달성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종교는 희생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종교가 자체를 중심삼고 세계를 제패하려고 한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통일교회는 희생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몽땅 묶어서 통일교회보다 큰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라고 그럽니다. 이 나라, 이 민족에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은 희생의 마음을 가지고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게 된다면, 지금까지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은 애국정신이 여기에서 현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국민을 사랑하는 새로운 전통이 여기에 세워지게 될 때, 그 전통을 세운 단체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론적입니다. 맹목적이 아니라구요. 알겠어요? 오늘날 통일교회가 나라를 위하는 것은, 나라를 완전히 품어 가지고 그 나라로 하여금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되느냐? 세계 인류 앞에 새로운 고차적인 세계의 사랑, 애국이 아니라 박애주의적인 세계의 사랑의 전통을 새로 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만 심어 놓게 되면 만민은 그 사랑의 길을 너도나도 좋아할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에도 좋아했을 것이고 현재도 좋아하고 미래에도 좋아할 것입니다. 이것을 능가하는 시간성, 관념성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이것을 표준하고 종착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모체요 기원이기 때문에 그 사랑만이 인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 사랑을 위주로 한 평화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통일교회 사상은 대한민국이 복귀되는 날에는 대한민국의 백성을 묶어서 세계 인류를 위해서 희생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가 찾고자 하는 나라입니다. 좋아요. 나빠요?「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망하느냐? 망하라 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왜 망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미칠듯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데는 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면 사탄이 와서 치고 악당의 침범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미칠듯이 좋아하는 데에 누가 침범했다가는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악신과 선신의 투쟁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느냐? 사랑을 중심삼고 한다는 걸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결국 남을 위하여 보다 큰 것을 위하여 희생하게 될 때, 희생하려는 사랑의 마음을 갖고 가는 날에는 선신이 관리하는 것이요, 그렇지 못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남을 희생시키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반대로 악신이 주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딱 갈라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을 가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태어났고 너는 나를 위해서 태어났다'고 하면 그는 도깨비입니다. 낮도깨비라구요. 대한민국의 위정자들도 여당 야당하고 싸우게 되면 낮도깨비밖에 안 되는 거예요. 이러한 것을 우리가 가려 가지고 잘 정리해야 됩니다. 알겠어요?
본래 인간이 태어나기를 남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면 어떻게 되느냐? 사랑의 전통이 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랑의 중심자가 되는 것입니다. 뭐가 돼요? 틀림없이 사랑의 중심자가 되는 것이다.
학교로 말하자면 그 학급 전체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반장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남을 위하는 입장에 선 사람이 반장이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을 위해서 살았고,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을 위해서 살고 있다면, 그는 자연히 민족적인 중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중심자가 되어 가지고는 무엇을 할 것이냐? 꼭대기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중심자는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꼭대기에 올라가게 되면 자동적으로 무리를 지도할 수 있고 주관할 수 있습니다. 주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리원칙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악당은 어떤 사람이냐? '너희들은 나를 위해서 있다' 하는 사람이 악당입니다. 공산당식은 말이예요, '네 것은 내 것이고 내 것도 내 것이다' 하는 것이라구요. 그것은 일시적으로는 흥합니다. 올라갔다가는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선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면 또 올라가는 것입니다. 내려오지 않고 또 올라가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올라가느냐? 세계 제패, 하나님까지 굴복할 수 있는, 하나님에게까지 미칠 수 있는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까지도 바라는 자리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흥하는 것이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완전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느냐? 인간의 완전이라는 것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 완전은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돈 중심삼고 완전이 있으면 좋겠어요,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이 있으면 좋겠어요? 대답해 보세요. 돈을 중심삼고 완전이 있으면 좋겠어요,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이 있으면 좋겠어요? 혹은 지식을 중심삼고 완전이 있으면 좋겠어요,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것은 물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리 타락한 인간이 무지한 두뇌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구요.
사랑을 중심삼고 출발할 수 있는 완전한 기준이 어디냐? 그것이 나입니다, 나. '나'라는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본래 태어나기를 남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렇지요? 남을 위하는 자리가 어떤 자리라구요?「완전한 자리입니다」 완전한 자리입니다.
남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고 하면 기분 나쁘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완전한 자리는 남을 위해서 출발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복귀완성, 완전복귀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남을 위해서 미친듯이 산 사람입니다. 결론이 그렇게 나오는 것이라구요.
하나님은 지금 어떻게 계시느냐?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 지금까지 계셔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절대적인 기준에 도달한 상대가 없기 때문에 상대가 절대적인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수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다구요.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돼요.
완전복귀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냐? 자기를 중심삼은 데서? 아니예요.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는 자리에서입니다. 이것도 기분 나쁘지만 할 수 없다구요. 그래서 예수님 같은 양반은 참 위대하신 분이라구요. 그가 한 말을 보면 죽고자 하는 자는?「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죽는다」이렇게 얘기한 것을 볼 때 예수님이 위대하고 성경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아주 딱 들어맞는다구요.
죽고자 하는 것이 부정이요, 긍정이요?「부정입니다」 완전부정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살고」 사니까 그는 소망이 있다구요. 생명이 있으니 소망이 있지요. 살고자 하는 자는?「죽는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말한 대로 살았느냐? 사랑했느냐?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걸 볼 때 그분이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 이예요?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했으니 누구 뜻대로 산 사람이예요?「아버지 뜻대로요」 태어나기를 아버지를 위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게 됐다는 거예요. 그거 맞지요?
그 다음에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이 행하는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원수를 위해서 복을 빌었다구요. 그게 누구를 위해서였어요? 자기를 위해서예요? 원수를 위해서였다는 거예요. 원수지만 원수가 소망할 수 있는 자리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는 그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다구요, 이러한 원칙을. 그야말로 완전히 남을 위해서, 원수를 위해서 복을 빌었으니 그는 완전히 남을 위해 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전통은 역사를 지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분인데, 하나님을 닮은 그분이 망하게 되면 천도(天導)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러한 분인데, 그분을 닳은 아들의 모습이 땅 위에 나타나니 그의 움직임이 하나님이 바라는 소원을 이루는 행동임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의 사상은 세계를 제패했다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면 '아! 이건 내 돈이다' 하는데, 그게 자기 돈이예요? 자기가 돈을 벌었다 해도 자기 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돈이 아니라구요. 그건 남의 돈이예요. 그렇지요? 대한민국의 돈이 대한민국의 돈이예요? 세계의 돈이지요. 그러면 세계의 돈의 주인은 누구예요? 미국 대통령이면 미국 대통령이 주인이 아니라구요. 어림도 없습니다.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물건들도 내가 가졌으니 내 것이라구요. 내 것 가지고 또 내 것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내 것이 되었으니 주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이 부잣집 아들의 도리라구요. 졸장부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게 하나님은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딸도 그렇게 생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랑의 등급은 어떻게 돼 있느냐? 더 큰 것을 위해서 희생할수록 사랑의 등급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보다도 가정까지도 나라를 위하여 희생시키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애국자가 되는 것이고 애국자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애국자의 가정만 되어 가지고는 안 되는 거라구요. 또, 가정과 종족을 이끌어 가지고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게 되면 애국자뿐만 아니라 애국종족이 되는 것입니다, 애국종족.
대한민국에 애국종족이 있어요? 대한민국에 김해 김씨가 많다고 자랑하지만 자랑할 게 못 된다구요. 이 녀석들, 순 돼지 새끼같이 많으면 무얼 하느냐 이거예요. 많으면 좋긴 좋은데 애국종족이 되었느냐? 애국종족이 아니라 나라를 도둑질하려고 한다 이거예요.
나라를 세워 가지고 내 손아귀에 넣겠다는 것과 나라를 세워 가지고 세계 안에 넣겠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내 손안에 넣으려고 하면 악이요, 이것을 세계에, 하나님 앞에 갖다 바치려고 하게 되면 선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대한민국을 만들려고 해야지 김해 김씨의 대한민국을 만들면 쓰겠어요? 대한민국 자체에 물어 보세요. '너 김씨의 나라가 될래, 세계의 나라가 될래?' 하면 그건 물어 볼 것 없이 세계의 나라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사람 될래요. 세계에서 유명한 사람 될래요? 물어 볼 게 어디 있어요? 세계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그렇지요? 개인이 그러하듯이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도 문 아무개 통일교회 만들려고 하면 그 문 아무개는 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 아무개도 통일교회를 세계적인 통일교회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라구요. 그래서 여러분을 세계적인 수난길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라는 겁니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통일교인들은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더 큰 것을 위해서 희생하는 데에는 망하지 않고 남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무리로 말미암아 완전복귀를 계획할 수 있지, 그 외의 것을 가지고는 완전복귀라는 것은 꿈도 못 꾸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의 사상은 나는 그대를 위해서 있고, 나는 가정을 위해서 있고, 가정은 나라를 위해서 있고, 나라는 세계를 위해서 있고, 세계는 하나님을 위해서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 하나님이 무엇을 위해 있다니,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있지 할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위해서 있습니다. 이래야 평화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남자는 누구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즉 상대를 위해서. 부모는 누구를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가정은 누구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있어야 합니다.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가정만을 위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는 징조라구요. 그러므로 보다 더 큰 것을 위하는 이 고귀한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민족사상을 일원화시켜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라가 이루어지면 그 나라는 이러한 사상을 중심삼고 세계화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그 세계는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체이시고 세계는 상대이니까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있다구요. 하나님은 누구를 위해서 있느냐? 하나님은 상대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 주체와 상대는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 사랑을 위해서 있다구요. 여기에서 비로소 모든 것이 완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 완성의 출발은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세계를 위해서 희생할 때 완전 완성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완전 완성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보다 한 차원을 높여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게 되면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갈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왜 사랑을 뺐어요? 앞으로 통일교회가 성경을 개정한다면 선생님은 사랑을 집어넣을 겁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다'라고 말이예요. 사랑을 집어넣게 되면 하나님도 좋아하고 예수님도 좋아할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갈 자가 없고 하나님도 행복할 수 없다' 이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원칙이라구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틀렸어요, 맞았어요? 오늘 아침에 말하고자 하는 결론이 이것입니다.
기성교회 교인들이나 목사들이 들으면 기분 나쁠는지 모르지만 기분 나쁠 것 없다구요. 하나님에게 물어 보라구요, 그런가 안 그런가. 하나님은 묻기 전에 대답하려고 하실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세 가지는 항상 있을진대 그 중에 제일은 믿음이예요? 소망이예요? 사랑이다. 왜 사랑인지 그걸 몰랐다는 거예요. 왜 사랑이라고 강조했느냐? 그러한 전통적인 역사가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이제 알았다구요. 알았지요? 알았으니 그대로 살아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놓아 주리라' 했습니다. 타락은 했지만 이걸 알고 이대로 행하는 사람은 해방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보라구요. 성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중에 자기를 위해서 산 사람이 있어요? 성인을 보게 되면 제일 약자고 제일 못난 사람입니다. 자기 잘났다고 자기를 주장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구요. 성인은 무엇을 주장했느냐 하면 신(神)을 주장했습니다. 전부 다 신의(神意)를 중심삼아 가지고 산 사람들입니다. 신의 뜻. 그래서 성인들은 전부 다 종교의 종주(宗主)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독교의 종주요, 석가모니는 불교의 종주요, 공자는 유교의 종주요, 마호메트는 회회교의 종주입니다. 그들은 전부 다 자기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아니라구요. 주체 되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알겠어요? 주체 되시는 신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의 중심은 절대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주는 그 절대적인 하나님을 위해 있어야 한다' 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한 것입니다. 그것이 내면적 심정적 기준에 있어서 얼마나 넓고 깊으냐에 따라서 성인의 등위(等位)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예수라는 분을 볼 때, 그는 갈릴리 해변가에서 어부들을 데리고 살던, 그때에는 믿을 수 없는 사나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독생자뿐만이 아니라 '나는 인류의 신랑이다. 참된 아들의 사랑의 전통을 세워야 되겠고, 참된 남편의 전통을 세워야 되겠다. 나는 인류의 아버지다'라고 했습니다. 다 말했다는 거예요. 이런 의미에서 참된 아들의 사랑, 참된 부부의 사랑, 참된 어버이의 사랑, 이 세 가지에 대해서 기독교만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논의했다는 것을 볼 때,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성인들이 전부 다 그렇지요?
영웅은 세상에서 추앙하지 않아요. 힘으로 세계를 내 마음대로 해보겠다 하는 영웅이 뭐냐 하면 히틀러 같은 존재라구요. 자기 마음대로 되나요? 안 된다구요. 힘이 있는 한 또 다른 플러스입니다. '완전한 절대자가 플러스인데, 야! 이 녀석아. 네가 또 다른 플러스가 될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발입니다. 반발되니까 멀어지지요? 멀어지니까 인간 세계에서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절대적인 그분 앞에 마이너스가 되라고 가르치는 거예요.
악은 무엇이냐? 절대자 앞에 또 다른 플러스의 입장을 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은 뭐냐? 다른 플러스가 아니라 절대적인 플러스 앞에 절대적인 마이너스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없다. 남을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라는 것은 자동적으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압으로 말하면 저기압권입니다. 하나님이 고기압권이면 나는 저기압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저기압권인데 저기압권이 되었으니 기압권에서 고기압을 보고 아무리 오지 말라고 해도 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저기압이 되면 될수록 불어 닥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풍이라구요, 태풍. 그렇게 되는 날에는 사랑의 태풍이 불어옵니다. 알겠어요? 이것을 볼 때, 종교의 가르침이 위대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종교라는 것은 마루 되는 가르침입니다. 이름도 잘 지었다구요. 내가 그 이름을 지어 주려고 했는데. 누가 그걸 지었나? 종교라는 것은 마루 되는 가르침입니다. 마루가 제일 으뜸 아니예요? 그렇지요? 종교의 가르침의 골자는 뭐냐? '죽어라 이놈아. 희생해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느냐? 망할 것 같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망하는 날에는 도리어 뒤집어진다구요. 태풍이 불어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주체 앞에, 절대적인 플러스 앞에 절대적인 마이너스가 되어 하나되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이 우주 종말시대에는 이 태풍이 불면 역사가 날아가고, 인류가 날아가고, 세계가 날아가고, 공산주의가 날아가고, 민주주의가 날아가고, 다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태풍이 불어오면 아무리 튼튼한 철탑도 날아가지요? 바람에 무슨 철탑이 날아가느냐고 생각해요? 여러분은 이걸 알야야 됩니다.
이러한 원칙에서 우주는 형성되었고 그것이 미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재차 완성을 보기 위해서는 남을 위해서 존재하는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데서만이 승리가 완전할 수 있습니다.
타락은 무엇이냐? 자기를 완성의 기준으로 보고 자기를 주장하고 자랑한 것이 타락입니다. 자기를 주장한 것이 타락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높아진다' 이것은 자기 자랑이라구요. 그것이 타락의 동기라구요. 그런 인간이 하나님을 다시 만나려면 자기를 중심삼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체인데 그 주체 앞에 자기는 상대적 입장에서 자리를 찾아가야 됩니다. 완전한 자리가 무엇이냐 하면 상대적 자리이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됩니다. 그 자리 외에는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완전복귀의 출발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나가는 사람은 완전복귀의 과정을 가는 사람입니다. 완전복귀의 과정뿐만 아니라 완전복귀의 완성까지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어떻게 가야 되느냐? 실질적인 문제로 들어와서 통일교회 교인들은 어떻게 가야 되느냐?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책임자인 문선생이라는 사람은 대학 교수든, 선생이든,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몽땅 합쳐 가지고 죽으라고 내몰아야 됩니다. 누구를 위해서? 통일교회를 위해서 죽으라고 하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치에 안 맞아요. 그럼 통일교회 교인들은 누구를 위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이상(理想)의 나라를 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이상의 나라가 이 땅에 있어요? 없다구요.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이상의 나라를 위해서 통일교회 교인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여기에 이의가 있어요, 없어요? 이의가 있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내 하나 물어 보게요.
그렇게 해서 통일교회가 망한다면 선생님의 목을 자르라구요. 망하는 것 같지만 결과는 어떻게 된다구요?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개만 넘는 날에는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가던 것이 꺼꾸로 뒤집어진다는 거예요. 고기압이 될 때에는 바람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기압의 경계선만 넘어서는 날에는 뒤넘이치는 것입니다. 그런 놀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은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느냐? 대한민국만을 잘살게 하려는 생각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희생시켜서라도 세계를 구하겠다는 사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쁜 패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대한민국이 세계를 구하는 날에는 대한민국은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중심자가 된다고 그랬지요? 중심자가 되지 말라고 해도 중심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관자가 되지 말라고 해도 주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빠른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취해서 나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지혜로운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얼마만큼 지혜로운 사람이냐? 하나님만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만큼 지혜롭다고 하니까 '야, 이거 하나님만큼 지혜롭다니' 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렇다는 거라구요. 하나님이 그 길을 따라 나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망하지 않고 끄떡없이 당당코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한테 '나를 위해서 당신이 있소?' 할 때, '그렇다' 하게 만들 수 있는 지혜를 따라가자는 것이 통일교회 패들입니다. 패라고 말하면 좀 이상스럽지만 패들입니다. 패라고 말하는 것이 실감나거든요. 많은 패들 가운데 으뜸가는 패라는 걸 여러분은 알아야 돼요.
완전복귀는 내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밥을 먹어도 자기를 위해서 밥을 먹는다 하는 패는 완전복귀의 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밥을 먹어도 세계를 위해서 먹자, 일을 해도 호미 자루로 땅을 파지만 세계를 위해서 판다는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무엇이든지 나라를 위해야 됩니다. 나라를 찾은 후에는 세계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라구요. 통일교회는 나라를 찾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에서만이 완전복귀의 길이 열리는 것이지 그 가외에서는 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보는 관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밥을 먹어도 오늘은 내가 무엇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이 나라를 위해서, 이 세계를 위해서 먹고 자는 것이다. 알겠어요? 그것이 여러분 앞에 본이 못 되거든 통일교회는 거꾸러지는 것입니다. 이걸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여러분에게 빚을 지려고 하는 사나이가 아니라구요. 일생 동안 빚을 지우고 살았다구요. 그것이 달라요.
여러분을 고생시키더라도, 통일교회 교인들을 깨깨 고생시키더라도 삼천만 민족을 구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거 기분 좋아요, 나빠요?「좋습니다」 그래서 입은 옷도 벗으라 이거예요. 있는 것 다 빼앗고 고생시키는 거예요.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희생시키고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풍조가 이 민족에게 사상으로 심어지면 북괴가 무서워요? 김일성이 무서워요? 이놈의 자식들. '너는 너를 위해서 국민을 착취하고 너를 위해서 국가를 유린하는 입장에 있다. 그건 오래 못 갈 것이다. 그 반대의 존재가 나올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이런 놀음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돼요.
역사는 지극히 멸망하는 도상에서 새로운 것이 발전해 나오는 것입니다. 지극히 흥하는 가운데서 새로운 것이 태동되는 것입니다.
사탄 세계가 흥하게 될 때에는 선이 패하는 자리에 있는데, 흥하는 세상에서 배척받는 선한 패가 나오는 것입니다. 망해 내려가도 거기에서 또 선은 발전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기 골짜기가 아니면 절정시대에서 새로운 문화는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인류 문화세계를 보면….
공적인 기준이 퇴폐하게 될 때에는 반드시 새로운 공적인 사조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공적인 사조가 퇴폐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세상적인 면이 흥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문화권이든지 흥하고 나면 반드시 망하는 법입니다.
왜 그러느냐? 인륜 도덕이, 남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상이 없어지기 때문에 내려가는 거라구요. 그리고 망하는 사람, 못사는 사람들이 돈 한푼이라도 더 긁어 모으려고 하지요? 눈이 뒤집어져 가지고 남을 밟고 자기가 올라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망하기 마련입니다. 거기에서 반대되는 사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극과 극에서 새로운 선의 문명이 출발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금후에 어떻게 될 것이냐? 이런 점에서 볼 때, 모든 것이 확실해야 합니다. 사람을 쓰는 데도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말하는 투를 보면 '너의 한계선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을 압니다. 선생님이 통일교회 교인들을 쓰는 데 있어서도 자기를 중심삼고 꼬리를 틀어 돌아가는 녀석들은 안 씁니다. 써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희생시키고 자기의 전체를 잊고 공적인 면에 나가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발전시켜 줘야 합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관이라구요. 이것이 하나님이 보는 관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니 통일교회 교인들은 먹으나 자나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됩니다.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완전복귀의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기 바랍니다.
아버님, 당신이 찾아 나오신 소망의 터전이 세계에 있는 줄 알았는데, 오늘 저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님의 사랑은 고귀한 사랑이며, 그 고귀한 사랑은 세계가 직선상에서 통할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에 세계를 위하는 자리에서만 성사될 수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는 데에는, 자기 나라인 이스라엘이 원수가 아니라 로마나라가 원수이기 때문에, 로마나라를 사랑했습니다. 극과 극에서 사랑했다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죽으면서도 남을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로마 자체가 그의 무릎 앞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인 사실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이것이 선이 존재하는 원칙적인 기반이요, 선이 승리해 나가는 원칙적인 노정이요, 선이 결정적인 승리를 결할 수 있는 승패의 기준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아버님, 사람이 태어날 때 자신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높고 귀한 이 기준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세상이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아버님을 모실 수 있는 자리도 이 기준이 성립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버님이 계실 수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기준에 일치되지 않게 될 때에는 악이 관리하는 것이요, 아버님은 떠나고 악한 사탄이 임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사오니, 저희들은 이를 악물고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리를 사수하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는 통일의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아침에 완전복귀가 이러한 터전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사랑을 중심삼고 미치는 자리에서, 자기를 망각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완전복귀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께서 그러하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같은 모양이 되지 않고는 안 된다는 원칙이 그런 자리를 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노정을 끝까지 갈 줄 아는, 개인에서부터 세계를 복귀할 생애노정 끝까지 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만만세의 은사와 사랑이 당신의 경륜 가운데서 길이길이 승리로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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