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도]

2월의 마지막 성일 아침이옵니다. 아버지, 이날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1971년도를 맞이하여 당신이 분부하신 '통일기 반확보'를 위해 마음과 자세를 가다듬고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에 있어서 아버님이 인연된 기반을 닦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 기반을 닦기 위해서는 하나의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 목표를 중심삼고 대상의 기반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당신의 거룩한 뜻을 저희들은 진정으로 받아 들여야 되겠습니다. 수많은 인류가 생애를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뜻만은 이루어져야 되겠고, 당신이 수고로운 노정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역사적인 슬픔을 해원성사하는 것이 최고의 바람이라면 그 하나의 소원을 성사해야겠습니다. 어떠한 희생이 따르는 한이 있더라도, 개인을 통하고, 민족을 통하고, 국가를 통하고, 세계를 통하여서 수많은 곡절의 길을 넘어 희생의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오로지 당신의 뜻만은 성취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내일의 승리를 다짐하기 전에, 당신의 마음속에 그려져 있는 뜻길 앞에 슬픔이 있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매양 염려할 줄 아는 자가 돼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적마다, 아침 햇빛이 새롭게 저희들을 비춰 줄적마다 뜻을 중심하고 새로운 날이 되기를 바라야 되겠고, 광명한 햇빛과 같은 당신의 소망의 뜻을 사모할 수 있는 저희 자신이 되어야겠습니다.

매일의 생활에 있어서도 당신과 저희 사이에 간격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는 길은 저희들도 가야 할 길이요, 당신이 머무는 곳은 저희 들도 머물러야 할 곳이요, 당신이 싸우는 자리 또한 저희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자리이며, 당신이 원수와 대결하고 있는 자리 역시 저희들이 원수와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될 자리인 것을 저희들은 체휼하면서 가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말로서는 아버님을 대해 아버지란 말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저희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를 얼마나 사모하였고,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 앞에 부복한 자식이 되었으며, 뜻길에 있어서 당신이 잊을수 없는 저희들이 되었으며, 당신께서 모든 소원과 희망을 걸고 명령하실수 있는 자리에 저희가 선 때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당신이 요구하시는 자리는 당신이 저희들과 접하고자 하시는 간절한 자리요 역사적인 사명을 추구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개인적인 소원을 중심삼고 가인적인 생활을 해 나가면서 아버님과 의논하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인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이 시간 이 자리를 찾아오시옵소서. 뜻길을 위해 나아간 역사적인 선조들이 애달픈 길을 걸었지만 최후의 싸움터에서 승리의 깃발을 들지 못하고, 당신을 모시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했던 사실을 생각하게 될때, 오늘날 저희 자신들이 승리의 아들이 되느냐, 패배의 서러움을 머금고 당신에게 슬픔을 더해 주는 불효의 자식이 되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지어 나가야 할 운명길에 서 있고, 뜻의 길에 서 있는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아무것도 아닌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부복하였사옵니다. 당신이 저희들을 바라보게 될 때, 기뻐하시며 분부할 수 있는 저희의 모습이 되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날은 1971년도를 맞이하여 벌써 두 달째를 보내는 마지막 날이옵니다. 한 것 없이 지내 버리는 이해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뜻 앞에 있어서 눈물지으며 아버지와 더불어 피눈물을 흘리는 그런 자리가 아니고서는, 또한 아버지와 더불어 동참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갖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아버지의 뜻과 많이 접할 수 없는 것이요, 생명을 걸고 아버지 뜻 앞에 맹세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버지와 심정적 인연을 맺을 수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저희 들은 매양 스스로 안일한 자리를 찾아 나와 가지고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생각할 때는 많았사오나, 아버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입장을 중심삼고는 서지 못하였사옵니다. 아버님을 의지하면서도 전체를 비판하고 생활의 기준을 세우지 못한 저희를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여기에 엎드린 소수의 자녀들, 이들이 가는 길이 어디이며 이들이 머물고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를 이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일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세를 중심삼고 올바른 자세가 되어 있느냐. 아버님이 동방을 향하고 있는데 나 자신도 동방을 향하여 책임질 수 있는 자리에서 있느냐? 아버님이 거쳐 나가시는 환경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그 환경에 동참하는 자리에 섰는가를 알아야 되겠고, 만약 그 자리에 서지 못하였다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다시 따라가야 하는 입장인 것을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생명길은 누가 권고해서 가는 길이 아니요, 누가 이끌어 줘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이를 감당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특별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배가 고플 때면 나 자신이 먹어야 되고, 목이 마를 때면 나 자신이 마셔야 되며, 외로울 때면 이것을 풀기 위해 하나의 주체적인 입장에 서서 위안이 될 자격을 갖추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적인 이치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먹고 사는 데 있어서도 자기 스스로 주체의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피동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자기 스스로 다짐하면서 생명의 힘을 가해 나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솔직히 부복하였사오니, 당신이 저희 자신들을 바라보게 될 때에 악한 자리에 있거들랑 채찍질하시옵고, 선한 자리에 있거들랑 저희들의 손을 붙드셔서 내일의 소망의 뜻 앞에 활기를 띤 아들딸로서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싸움터를 인계받아 당신의 뜻 앞에 방해되는 모든 여건을 스스로 책임지고 나서서 당신이 믿을수 있는 충효의 자리를 개척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아침에 당신의 이름을 따라 모인 자녀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아들딸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방에 나가 있는 사랑하는 딸들에게도 아버지께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있는 정성을 다하여 사방에서 오는 것을 방어하는 그런 행보를 갖출 적마다 당신의 마음을 같이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슬픈 마음을 더듬어서 당신의 마음편에 설 수 있는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해이해지기 쉬운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자녀들이오니 아버지 뜻 앞에 의욕을 갖고 책임을 다할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그들 앞에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맡겨진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당신의 능력의 손길이 그들과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악한 편을 대하여 강하고 담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선을 중심삼고 주체적인 입장을 확고히 세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아니면 무엇이든 결정할 수 없고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버님만을 의지 하는 당신의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아들들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딸들한테 지지 않는 자랑스런 아들들이 되겠사오니, 당신이 기억하시어서 그 마음과 생활을 묶어 주시옵고 하늘이 기뻐하시는 소망의 터전 앞에 보조를 맞출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자녀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의 소망의 나라를 위하여, 통일의 세계를 향하여 힘차게 자신을 갖고 싸워 나갈 수 있는 아버님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모든 전체를 친히 맡으시옵고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은 특별한 집회를 개최하는 날이오니, 아버지, 친히 같이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과 내일 양일간에 걸쳐 대학에 있는 수많은 교수들에게 말씀을 전하려 하오니, 당신이 경륜하시는 뜻 앞에 새로운 시대를 열고 새로운 시기를 맞이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많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민족의 소망과 장래 이 나라의 운명과 세계가 갈 수 있는 방향을 대신하여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끔,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전체의 모임 위에 아버지의 보호와 긍휼과 지도와 관심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아울러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내일을 기해 3월을 맞겠사오니 내달을 대비하여야 할 자신의 입장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거룩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오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우리들은 매일의 생활을 연결해 나가는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루가 가면 내일이 오는 것이요, 내일이 가면 또 다시 모레가 옵니다. 하루 하루를 뜻 있게 보낸다면 소망의 내일이 찾아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자체가 내일과 상응할 수 있고 서로가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입장에 선다면 그것이 그러한 내일을 찾아가는 절대적인 기반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상관관계

오늘이 내일의 기반이 되는 것을 아는 우리는 현재보다도 나을 수 있는 미래를 바라서 지금보다도 미래의 더 가치있는 내용을 추구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이라는 것은 오늘과 거리를 두고 있기에 아직 미결정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결정 상태에 있는 것을 누가 결정상태로 옮겨 놓을 것이냐?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삼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기 자신이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시점에서 자리를 확실히 잡아 내일에 연관되도록 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기반을 확보해 두지 않으면 내일은 나와 상관없는 자리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반드시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매일매일의 생활에 있어서 그 소망과 일치될 수 있는 계획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소망과 일치될 수 있는 계획이 있고, 생활 환경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덧없이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의욕이 반드시 내 마음에 솟구쳐야 합니다. 내일이란 것은 오늘의 내 생활 가운데 있어서 하나의 꿈처럼 하나의 보물처럼 나타나는 것입니다. 꿈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면에 있어서 소망을 성취할 수 있는 조건도 되지만 반면에 그 좋았던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도리어 낙망과 절망을 가져다 주게 되는 것을 우리는 생활 가운데서 많이 느껴왔습니다.

오늘 여기 있는 자기 자체를 두고 볼 때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24시간을 거치는 과정에 있어서 내일을 지탱할 수 있는 생활을 얼마나 하고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1971년 2월의 마지막 날을 맞이했습니다. 금년 들어와 벌써 1월 2월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두 달을 보내는 동안에 우리가 지난날 얼마나 내일의 소망을 중심삼고 의욕을 갖고 지냈느냐 하는 문제를 다신 한 번 회고해 보아야겠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차이가 없는 생활을 했다면 오늘과 내일 사이에 차이가 날 수 있는 내용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발전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을 두고 볼 때 나날이 발전해서 변화의 폭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성공의 자리가 그 사람에게 가까와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요, 노력한 만큼 시간이 단축되어 접근해 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 생활을 하게될 때는, 1971년 연초에 결의했던 '통일기반 확보'라는 목표는 목표대로 남아 있고 나는 나대로 남아져서 그 뜻과 나와는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뜻과 나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오늘은 내일의 기반이 되고 내일은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려면 어제보다도 오늘이 더 의욕적이어야 되고 오늘보다도 내일이 더 의욕적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목적을 중심삼고 의욕에 사무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해이해지게 되면 내일의 소망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내일의 참된 모습을 맞이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용서할 수 없는 원수와 같은 것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제보다도 오늘, 오늘보다도 내일에 보다 더 의욕을 가지고 참된 신앙을 하기 위해서는 보람 있는 시간을 어떻게 증진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일을 맞이하는 자로서 그런 입장에 있어야 타당하지 그렇지 못하게 될 때는 내일이 나와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언제나 부단한 투쟁의 노정을 거쳐가고 있습니다. 투쟁은 소모전입니다. 반드시 어떠한 소모를 하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나 내적인 면에 있어서 어떠한 소모를 요하는 것이 투쟁입니다. 이 투쟁과정에 있어서 소모되는 것을 무엇으로 복구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외적인 물질적 조건으로나, 혹은 내적인 정신적 조건으로 반드시 소모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소모되면 어제보다 작아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 내일보다 나을 수 있는 입장에 서려면 소모된 것을 충당하기 위한 부단한 제 2의투쟁을 가중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소모의 구렁텅이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면 보다 나은 내일이 이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원치 않는 결과의 자리에 떨어져 허덕이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면에서나 혹은 생활적인 환경에서 많이 느끼는 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일을 중심삼고 내일의 기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또한 오늘을 보내면서 더 의욕적인 태세를 어떻게 가중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아침에 밥을 먹었다고 해서 점심과 저녁을 안 먹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을 먹었더라도 점심 때에 가서 보충해야 하고, 또한 점심을 먹었더라도 저녁 때에 다시 보충해야 내일의 한날을 계승할 수 있듯이,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하루의 생활을 이어가는 데 있어서 혹은 목적을 달성하는 의욕을 가꾸어 가는 데 있어서 해이해지는 자리를 어떻게 피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밥을 먹어서 배고픔을 피해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의욕을 중심삼고 내일의 뜻을 이루어 가는 데 있어서는 해이라는 것은 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매순간마다 의욕적인 입장을 가중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자체가 그 의욕을 가중시킬 수 있는 주체의 입장이 못 되었다 할 때는 그 자리에서 의욕을 가중시키려 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중심삼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의욕적인 기준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주체적인 입장에 서지 못하였다 할 때, 어떻게 주체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확보하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체적인 입장에 서지 못하면 상대적인 입장에라도 서든가 둘 중에 하나의 입장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내일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오늘날 뜻을 중심삼고 살아가는 통일교회 교인들 가운데 누가 주체의 입장에 서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주체적인 입장에 서지 못하였으면 반드시 상대적인 입장에라도 서 가지고 그 주체가 움직여 나가는 환경과 노선 앞에 보조를 맞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가 움직이는 방향과 일치해 가지고 그가 거쳐 나가는 환경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입장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주체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면 주체가 지향하는 행동과 방향에 맞추어 관계의 도수를 가중시켜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 통일교회는 나가는 방향에 있어서 남자들보다 여자를 내세워 가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남자들이 주체가 아니라 여자들이 주체의 입장이 되어 통일교회 전체를 대신해서 선두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두에 선 그들과 상반된 자리에 설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입장에 선 그들과 상응되는 자리에 서서 그 주체 앞에 대상이 되어서 주체와 동일한 보조를 취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주체와 대상의 인연을 중심삼고 새로운 하나의 의욕적인 환경을 계승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실을 극복하려면

만일 이러한 기반을 여러분 자체가 형성하지 못하게 되면 여러분은 주체도 되지 못하고 대상도 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렇게 주체적인 입장에 접할래야 접할 수 없고 대상의 입장에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되면 반드시 여기에서 해이한 입장을 모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입장에 서기 쉽다는 것을 매일매일의 신앙생활과 일상생활권내에서 체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입장에 서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를 중심삼고 과거가 주체가 되고 있느냐, 현재가 주체가 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가려 봐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형성되지 못할 때에는 미래를 소망의 주체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미래의 소망을 중심삼고 그것을 주체로서 모실 수 없는 해이한 입장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과거를 주체로 삼고 현재를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과거에 받았던 은혜를 그대로 흘려 보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길을 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해이할 때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럴 때는 과거의 신앙생활을 하나의 주체로 삼아서 오늘 현실적 환경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과거 은혜 생활을 하던 때에 기록한 일기를 다시 보거나 기도 가운데서 체험한 것들을 다시 한 번 회상한다든가 하여 그때의 심정을 재생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때에 행한 것을 다시 반복함으로 말미암아 과거보다 자극적인 입장에서 결의해야 할 것입니다. 정도는 낮을지 모르지만 다시 한 번 그런 심정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서 어떻게 자기몸에 그때의 체험을 재현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몸부림을 치지 않고는, 오늘 여러분이 해이한 그 입장을 해결할 방안이 없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뜻을 대해 가는 데 있어서 교회 전체를 대표한 입장에 있는 주체, 진리적인 측면에 주체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 주체와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상대적인 인연을 갖추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자기의 과거 생활과 현재의 생활을 비교해 볼 때 과거가 오늘보다 낫다면 그 과거의 생활을 현재의 생활에 재현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때 가졌던 결의를 어떻게 다시 한 번 스스로 모색하느냐, 그때에 느끼던 심정을 어떻게 다시 한 번 체휼하느냐, 그때에 내가 싸워오던 환경을 어떻게 다시금 재현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이것이 자기 스스로 기도 가운데서 해결되지 않으면 행동적인 면에서라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 뜻길을 가면서도 교회와 격리되기 쉽습니다. 교회와 나를 두고 볼 때 교회 안에 있는 내가 아니라 나 자신을 중심삼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전체를 중심삼고 교회 앞에 있는 나 자신이 되지 않고 교회와 격리된 입장에 있는 제삼자의 입장에 서게 되면 교회와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교회에 대한 관심이 없어집니다. 자극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와 자기와의 관계가 점점 희박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교회생활이 해이해지는 입장에 아니 떨어질래야 아니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때 금년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 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교회 전체를 대신해서 주체적으로 활동해야 하고, 그 활동에서 여러분 자신이 고립되지 말라는 겁니다. 고립된 입장에 서지 말고 주체와 보조를 맞추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같이 보조를 취하며 싸워 나갈 때 선두에 선 사람들이 느끼고 채택하고 의욕을 갖고 있는 환경을 살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를 대표하여 주체적인 입장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보다 앞서 나갈 수 있는 입장에도 서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의 때를 세워 움직이는 입장에 서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관계를 맺으실 것입니다. 이렇게 선두의 자리에 서서 나가게 되면 거기에는 낙망이라든가 해이라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과거에 비해 해이한 자리에 서게 됐다면 어떻게 그 자리에서 헤어날 수 있겠느냐? 옛날에 자기가 가졌던 신앙 경험을 자신은 잘 압니다. 그때 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가? 혹은 본부면 본부를 생각했던 마음이 어떠했던가? 선생님을 중심삼고 하늘 앞에 내가 충성했던 때 어떻게 했던가 하는 것을 중심삼고 자신의 상태를 감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두 감별해서 제 1은 어떻고, 제 2는 어떻고, 제 3은 어떻다는 것을 판결해 가지고 그것을 중심으로 자신을 희생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도리를 다해 나가며 행동으로 실제 생활에 자신의 과거를 재현시키지 않고서는, 과거의 은혜로왔던 자리를 자체 앞에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해이한 입장에 섰다면 어떻게 하든지 의식적으로 혹은 고의적으로라도 그것을 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과거보다 나을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됩니다. 과거에는 하루에 한 번씩 본부교회에 왔다면 이제는 두 번 이상 다녀가야 합니다. 옛날에는 기도하면 은혜가 되었는데 지금은 은혜가 안 된다면 그때 10분 동안 하던 기도를 20분, 30분, 한 시간 이상 하라는 거예요.

어떻게 하든지 그때의 마음을 희생시키고 그때의 심정을 오늘에 옮겨 미래의 터전으로서 계승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과거와 현재의 관계는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떨어진 입장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은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의욕을 줄 수 없을 것이요, 직접적으로 은혜의 손길을 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외로운 입장에서 은혜에 사무친 심정을 가졌거든 그것을 위해 외로운 자리를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혹은 누구보다도 억울함을 당한 자리에 서서 그런 체험을 하게 되었다면 그때 그 체험을 여러분이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기쁜 자리에서 체험했거든 기쁜 마음을 희생하는 자리에서 이것을 다시 한 번 해야 되고, 슬픈 자리에서 체험을 했다면 하나님이 위로할 수 있는 더 큰 슬픔의 자리에 나가지 않고는 옛날 이상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떠한 자리에서 신앙길을 출발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슬플 때 출발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외로울 때나 기쁠 때 출발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절망했을 때나 누구와 의논할 때, 혹은 누구를 모실 때나 봉사할 때, 또는 어떤 것을 위해 일선에 섰을 때, 이렇듯 각자 나름대로 출발의 계기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해 나오면서 은혜가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가 하는 것을 상기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뭇사람 앞에 책임을 중심삼아 가지고 책임자의 위신을 생각하여 뜻을 위한 일을 해야 합니다. 누구 보다도 더 어려운 자리에 나가고 억울한 자리까지 몰리더라도 이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물리는 자리가 내일의 슬픔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요, 내일의 갈 길 앞에 있어서 슬픔을 가중시키는 자리가 아니라 내일의 새로운 은혜를 가중시킬 수 있는 은사의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의 참된 의미

씨를 뿌리면 뿌리는 대로 거두어 들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슬픔으로 뿌리기 시작했으면 슬픔으로 거둬야 합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출발했으면 십자가로 거둬야 합니다. 십자가로 뿌려 가지고 기쁨으로 거두려 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로 뿌려 가지고 기쁨으로 거두는 법은 없습니다.

십자가로 뿌렸으면 십자가로 거둔 다음에 기뻐해야 하는 것이며, 기쁨으로 뿌린 씨앗은 기쁨으로 거두어서 다시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슬픔으로 뿌렸으면 슬픔으로 거두어 가지고 기쁨으로 가는 것이요, 기쁨으로 뿌렸으면 기쁨으로 거두어서 기쁨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뿌렸으면 기쁨으로 거두어 가지고 기쁨으로 갈 것 같지만 그렇게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뿌렸으면 기쁨으로 거두어 가지고 슬픔을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오. 은혜가 있은 후에 반드시 시험이 있었습니다. 시험이 있으면 반드시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은 시험으로 시작해서 시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다가올 은사가 크면 클수록 그 시험 기간이 짧은 것이 아니라 비례적으로 은사와 맞먹는 시련 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은혜가 크면 클수면 시련 기간은 깁니다. 이 시련 기간을 극복하고서야 기쁠 수 있는 은사의 때를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아침이 오면 저녁이 오고 낮이 오면 밤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은 주고받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처럼 상하 관계로 연이어 나가든가 좌우 관계로 엇물려 나가든가 하기 때문에 언제나 계속 유지되는 것입니다. 한 번 높았으면 낮아지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좋았다고 반드시 좋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을 거두어 가지고 다시 슬픔을 맞이한 이후에야 비로소 하나의 터전이 닦아지는 것입니다.

기초를 닦는 데 있어서도 기초가 그냥 닦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기초를 닦으려면 반드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어려운 이상 소원이 남아야만 어려운 터전 위에 하나의 존재로 남을수 있지 그렇지 못할 때는 사실상 기초가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반대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반대의 도수가 강해진다고 아내의 신앙이 해이해지지 않습니다. 핍박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출발했을 경우 반대가 극심할 때 해이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하던 그 상대가 도리어 이해해 주는 계기가 오게 될 때 해이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가 없는 경우, 열이면 아홉은 해이해지기 쉬운 것입니다. 원수는 어디에 있느냐? 반대가 극심할 경우 이것을 대비하려고 자기의 뜻을 강화 시키는 자리에 원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완성되어 안식할 수 있는 하나의 터전이 닦여진 이후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터전 위에 있을 때 원수가 공격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눈물로 시작한 사람은 눈물로 거둬야 합니다. 십자가로 시작했으면 십자가로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계승하느냐? 개인적인 십자가의 길로 시작한 사람은 가정적인 십자가의 길을 계승해야 합니다. 가정적인 십자가의 길을 거친 사람은 종족적인 십자가, 민족적인 십자가, 국가적인 십자가를 계승해야 합니다.

가중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할 인간

십자가로 시작했으면 반드시 십자가로 계승되는 것입니다. 또한 은혜로 시작했으면 은혜로 계승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과거 개인적인 섭리시대에 있어서 십자가의 수난길을 걸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졌을 경우 그것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십자가의 수난길 이상의 자리에 나가지 않고는 먼저 쓰러진 그 사람의 사명을 이어나갈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사명이 그런 것처럼 가정적인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적 사명, 국가적 사명, 세계적 사명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개인탕감이 있으면 가정탐감이 있는 것이요, 가정탕감이 있으면 종족탕감이 있는 것이요, 종족탕감이 있으면 민족탕감이 있는 것이요, 민족탕감이 있으면 국가탕감이 있는 것이요, 국가탕감이 있으면 세계탕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슬픈 복귀의 길입니다. 이것을 연결시키지 않으면 개인에서부터 세계까지 발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가중된 십자가 노정에 있어서 새로운 결의를 할 수 있는 출발이 벌어지지 않고서는, 다시 말하면 옛날보다도 더 강하게, 더 자신을 갖고 뜻 앞에 더 의욕 적이요, 하나님 앞에 더 심정적인 자리에서 시대적인 내용을 책임질 수 있는 무리가 나오지 않고서는 이 십자가의 탕감노정을 발전시킬 수 없는 것이 정상적인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이 자기 스스로 해이해진 것을 인정하면서도 과거와 같은 신앙길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출발은 십자가로 뿌린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십자가로 거두어 개인적인 승리의 한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승리의 한날을 맞이했다고 해서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인 승리를 맞이하고 나서는 제 2차 십자가의 노정을 떠나야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가정적인 십자가의 노정을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승리는 가정적인 출발노정에 있어서 하나의 모체가 됩니다. 개인적인 십자가 노정에서 내게 힘으로 작용했던 것이 가정적 십자가 노정을 갖추어 나가는 데 있어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찾아진 기쁨은 내 개인의 기쁨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쁨이 내게 필요할 때까지 가중된 수난길에서 열매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그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장 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 분은 이러한 사실을 가슴 깊이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가슴 깊이 보관된 그 자체 위에 기둥을 세워야 합니다. 그 터전 위에 자기 자신이 서지 앉으면 과거에 받았던 은사에 곁가지를 쳐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무시해 버리고 이 터전 위에 서지 않게 된다면 반드시 그 터전은 무너집니다. 그렇게 되면 가정적 십자가의 노정을 출발했다 하더라도 다시 개인적인 십자가의 노정의 승리의 터전을 반복하여 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십자가 노정에서 얻어진 결실의 기쁨이 있으면 그 기쁨은 영원한 기쁨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공고화시킨 터전 위에 나 자신이 확고히 서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분야가 넓은 만큼 거기에 해당하는 십자가도 클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가정적 십자가에서 승리했다면 그 승리한 결과는 반드시 가정을 중심삼은 기쁨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같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나간 그 가정의 아들딸들은 반드시 천운을 타고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보고 가정적인 기쁨이 있다고 해서 가정적 기쁨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것으로 만족한다고 하는 안식의 자리, 해이한 자리에 머물게 되면 그것으로써 그 가정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종족적 십자가의 노정을 거쳐가야 할, 뜻이 요구하는 사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정적으로 허락된 하나님의 은사가 크다 해서 거기에 자리를 잡고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차원에서 아무리 승리를 했다 하더라도 가정적 승리로 끝나지 말고 종족적으로 더 고차적인 거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정적인 은사의 터전에 그대로 머물게 되면 종족의 때를 연결시킬 수 없고 민족적인 때를 향해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갈 길을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방황하다가 후퇴해 버리게 되면 아무리 뜻이 발전한다 해로 뜻과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면 자기 스스로 해이해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더불어 생명줄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발전을 하지 못합니다.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라지 못하면 후퇴하고 마는 겁니다. 탕감복귀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어떠한 가중된 십자가의 노정을 범위를 넓혀 찾아오는 것입니다. 범위를 넓혀 찾아가는 데 있어서는 함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류적인 노정을 중심삼고 개인적인 탕감노정, 가정적인 탕감노정, 종족적인 탕감노정, 민족적인 탕감노정, 국가적인 탕감노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정에 있어서 환경의 범위는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적 섭리의 때와 민족적 섭리의 때의 차이는 방대한 것이지만 내용만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나와 가정 문제, 나와 사위기대를 중심삼아 가지고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범위와 그 위치는 차이가 있을 망정 그 내용만은 마찬가지입니다.

가중된 탕감의 길도 하나만 되면 갈 수 있다

그러면 개인적인 십자가의 때와 가정적인 십자가의 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극복하기 어려우냐? 범위는 가정적인 것이 넓지만 개인적인 때를 극복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개인이 승리한 터전만 가지면 가정적 기준은 극복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경우는 개인적인 사탄의 참소권내를 벗어났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개인에게 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개인적인 시대에서 체휼한 내용이기 때문에 수습할 수 있습니다. 수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탕감노정을 극복하기가 더 힘드는 것입니다.

가정적 탕감노정과 종족적 탕감노정 중 어느것이 더 힘드느냐 할 때 그 범위와 위치에서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방대하게 차이가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가정적인 때보다도 종족적인 때가 더 쉽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를 중심삼고 사위기대를 이루어 하나되면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민족을 붙들고 기도하고, 민족을 붙들고 어떻게 하든지 극복해 나가면 종족적인 섭리의 때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있더라도 가정을 중심삼고 주체의 입장에서 그 대상을 붙들고 어려움을 극복하면 이미 사위기대 위에 있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당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려움이 동쪽 방향에 있으면 동쪽 방향을 중심삼고 지나가 버리지만 서쪽에서는 그와 반대 입장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주위 환경을 거쳐 나가는 데 있어서 언제나 핍박과 괴로움과 싸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쪽에는 다른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면에서 반대가 나타날 수는 있으나 사방적인 면으로 반대의 여건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때보다도 가정적인 때가 쉽고 가정적인 때보다도 종족적인 때가 쉽다는 거예요. 종족과 민족을 범위로 보게 되면 차이가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도리어 종족적인 때보다는 민족적인 때가 쉽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이 하나되고 종족을 중심삼고 민족이 하나되고 다시금 민족을 중심삼고 주체성을 완전히 확보해 가지고 하늘과 일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중심삼고 언제든지 하나될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 변치 않고 일치되었다 할진대는 종족이면 종족을 통해서 민족을 중심삼은 탕감노정을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 기반을 계승한 터전 위에 가정적 기반을 계승하고, 가정적 기반을 계승한 터전 위에 종족적 기반을 계승하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가정적 핍박의 노정보다 종족적 핍박의 노정이 쉽습니다. 종족적인 기반에는 개인 기반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민족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종족 기반을 넘어서는 것보다도 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족 기반을 마련하는 때에 들어와 있다면 가정은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가정 위에는 개인적 승리의 터전이 반드시 조성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족적 권내에 섰다 할 때는 반드시 개인적 탕감노정의 기반 위에 선 것이요, 가정적 탕감노정의 기반 위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과 가정과 종족이 하나된 권내에 섰다 할 때는 민족복귀를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그 사람의 과거가 사탄으로부터 침범받을 수 있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중요성

하나님의 슬픔은 복귀섭리노정에 왔다 간 중심인물들이 과거에 사탄으로부터 침범을 받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에도 싸우고 있다 이겁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지상을 중심삼고 복귀섭리의 터전을 마련해 가는 것입니다. 과거를 상실하지 않고 현재를 상실하지 않으면 내일의 승리는 거기에 같이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병이 나지 않고 정상적으로 자라 나온 나뭇가지에는 꽃이 피게 됩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런 나무는 과거에 안전점을 확보하고 있음과 동시에 현재의 안전점을 확보하고 있으니, 내일에 대한 안전점은 여기에서 계승되는 것입니다.

탕감노정을 생각할 때 개인시대면 개인시대, 가정시대면 가정시대가 전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개인의 승리는 가정의 승리를 뒷받침하고, 가정의 승리는 종족의 승리를 뒷받침 하고,종족의 승리는 민족의 승리를 받침하고, 민족의 승리는 국가의 승리를 뒷받침하고, 국가의 승리는 세계의 승리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그 터전이 점점 높아간다고 해서 과거가 무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를 더욱 공고화시키는 것이 됩니다. 나무를 예로 들어 보면, 나무의 줄기가 굵다고 해서 과거에 가늘었던 줄기의 인연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인연을 그대로 계승해야만 정상적으로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지금 때는 어떤 때냐? 이것이 막연한 사람은 막연한 신앙자가 되는 것입니다. 막연한 사람은 해이된 입장에 안 있을래야 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기운을 내려고 해도 기운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늘이 함께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설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스스로 설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환경으로 계승해서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과거가 자기와 상관없다 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 주류의 노정을 가고 있는 사람의 과거를 인계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 있어서 선생님이 지난날 걸어온 노정을 회상하면서 여러분들이 현실에서 왜 눈물짓고 가슴 아파 하느냐? 그것은 선생님이 걸어 온 노정에 동참하는 특권적 혜택을 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역사를 상고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이것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망하는 운은 피하고 애국지사들이 남긴 사상을 현실화시키는 책임자가 되기 위해, 또한 보다 가치있는 내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역사를 회고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게 되며, 그런 사람이 국민을 대표해서 나서게 될 때 국가의 방향이 새롭게 설정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류의 노정을 걸어 온 사람의 과거를 인계받아야 합니다.

개인을 찾아 나온 탕감복귀역사

1960년 이후 우리는 횡적인 탕감노정을 걸어 나왔습니다.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한다 이겁니다. 종적인 역사는 개인을 찾아 나오는 역사 입니다. 여기에 가정이 출발함으로 말미암아 횡적인 역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돼요. 지금까지 6천년 섭리역사는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찾기 위해 수고해 나오신 역사입니다. 개인 찾기 위한 싸움이 6천년 걸렸다는 것입니다. 한 개인을 찾기 위해 아벨시대부터 지금까지 역사가 계속 연결돼 나온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다 해도 그것은 외적인 세계를 중심삼은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찾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는 가인세계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외적인 세계 앞에서 개인적으로 내적인 인연을 남기고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으로 내적인 인연을 이어 갈 중심존재가 누구냐 하면 재림주님이라는 겁니다. 그분은 외적인 중심존재로 결정되어 가지고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을 찾아 나와야 하지만 개인이 아직까지 승리의 결정을 보지 못했습니다. 소망의 결정은 보았지만 승리의 결정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 승리의 결정을 지으려면 가인 아벨의 원칙을 통해야 합니다. 소망적인 결정은 가인적인 입장이지만 승리적인 결정은 아벨적인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승리로 결정짓기 위한 것이 재림역사요, 그 일을 하시는 분이 재림주님이십니다. 가정을 중심삼은 소망적인 터전 위에 가정을 중심삼은 승리적인 결정을 짓는 것이 재림주님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종족적이요, 민족적이요, 국가적이며, 세계적인 승리도 재림주님이 해야 할 사명 입니다.

이렇게 해서 외적 세계를 내적으로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그 탕감복귀를 하는 데 있어서 개인 확정이 성립되지 않고서는 가정이 출발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림사상을 남기게 됐고, 다시 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기 위해서는 신랑 신부의 터전을 가져야 된다는 문제가 벌어 지는 거예요.

우리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느냐? 어떤 길을 가고 있느냐? 여러분이 이 일을 하고 있느냐? 여러분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의 중심을 중심삼고…. 중심은 이 길을 연결시키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승리의 때, 가정적인 승리의 때, 종족적인 승리의 때, 민족적인 승리의 때…. 아무리 민족이 넓고 아무리 국가가 넓다고 해도 크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을 중심삼고 싸움으로 말미암아 개인 승리, 가정 승리, 종족 승리, 민족승리를 확정지을 수 있는 터전에 섰다 하더라도…. 다시 말하면, 개인 승리, 가정 승리는 1차라 이거야. 가정은 개인이 중심입니다. 즉, 사위기대의 터전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러면 노아 가정-이 가정이 문제인데-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노아라는 한 개인이 문제라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아담 가정! 가정이 문제가 되는 거야. 그리고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노아 가정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아들이 중심이 되어야 된다 이거야. 아브라함 가정 하면 아브라함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가정이라 하면 아브라함 자신을 중심삼고 관계되어 있는 사위기대 터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신자의 자리에서 주류를 계승해야

여러분이 흔히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를 해 나간다는 말을 하지만 막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했댔자 한 부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여러분이 들어왔지만 여러분은 출발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계승자의 혜택권내에 있는 것이지 출발자의 혜택권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계승받아야 됩니다.

때문에 통일교인들은 통일사상을 배워야 합니다. 통일사상을 배우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되고 과거를 계승해야 합니다. 통일교인이면 통일 교회 역사를 알아야 되고, 그러려면 선생님의 과거를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의 과거와 동떨어진 사람이라면 스스로 암만 통일교인이라 자처해도 통일교인이 아닌 것입니다. 통일교인은 통일교회를 중심삼지 않으면 과거가 없는 거예요. 그 과거를 이어받고서야 현재가 성립됩니다. 현재라는 것은 과거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는 과거에서 나오고 미래는 현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일직선에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렇게 돼 가지고 만난다는 거야. '아 뜻이야 어떻게 되더라도 나 조금 있다 가도 괜찮지' 이러면 안 됩니다. '과거의 통일교회를 부정해도 현재의 통일교회는 부정하지 않는다. 주체적인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입장에 서는 것이다. 주류의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라 방계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방계적인 자리에서는 계승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생명의 계승과 자기의 모든 환경의 계승, 생활의 계승은 대신자의 자리에 설 때 가능합니다. 아버지가 아들딸에게 계승하게 될 때는 반드시 그들 가운데 자기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오늘의 생활로 말미암아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말미암아 계승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많은 아들 가운데서 어떤 아들이 과거에 나와 더불어 일치되어 나왔느냐가 현재를 계승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잼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가 있어야 합니다. 과거가.

아들은 아버지를 중심삼고 같은 입장에 서야 합니다. 제삼자의 입장에 서서는 안 됩니다. 상대적 입장에서는 계승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가 되든가 직계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양자라고 하면 종살이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종살이를 하고도 감사할 수 있는 자리를 걸어간 자이어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백을 상속받으려면 이백 이상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백만큼 감사만 하면 됩니다. 양자가 계승을 받으려면 백을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양자와 직계 자녀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통일교회에는 은혜가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따위 수작 그만두라 이겁니다. 은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리를 심게 되면 잎이 무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잎이 무성하더라도 거기에서 한 줄기 보릿대가 나오지 않으면 망하는 겁니다. 보릿대가 나오지 않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영양소를 흡수하여 결실해야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왜 해이해지느냐?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과거를 상속받을 수 있는 직계의 자리를 사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간단하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통일교회에서 특별히 지시하는 것을 실행하지 않고서는 절대 그냥 넘어설 수 없습니다. 제 1차 7년노정, 제2차 7년노정, 제 3차 7년노정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것으로 이 땅에 선포하는 것을 거치지 않고서는 절대 못 넘어갑니다.

이것이 절대 필요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7년노정으로 갈 수 있는 것을 못 가게 되면 7년의 3배인 21년이 지나도 못 갑니다. 21년의 3배인 60년은 걸려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을 이루지 못하면 그렇게 어려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내자를 잃어버린 사람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저 사람이 틀림없이 안내자라고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안내자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어디서 대신자를 구하느냐는 겁니다. 아무리 안내자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믿을 수 없는 거예요. 왜? 과거가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요?

그 사람은 과거를 계승한 신념적 기반이 희박하기 때문에 현재 안내자의 선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없는 거예요.

관계와 발전

그러면 과거와 오늘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 과거 60년대 통일교회와 현재 통일교회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선생님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선생님은 일방적인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사방적인 사람이 됐을 뿐입니다. 과거에는 여러분을 데리고 안방에서 일대일로 정성을 들였지만 이제는 사방으로 정성들이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입체적인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알고 보면 사방에서 가중된 은사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은 점적인 활동을 하는 때가 아닙니다.

개인적 복귀시대는 반드시 한 점을 통과해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복귀 역사도 한 점을 통과했습니다. 이 세계도 한 점을 통과해야 됩니다.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전부 다 개인에서부터…. 세계의 중심은 반드시 하나입니다. 그 하나는 개인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섭리시대는 전체의 은사의 역사를 한 개인을 부활시키는 데 주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 아버지는 자식이 다 자랄 때까지는 자식을 기르는 데만 주력합니다. 자식은 커 가면 커 갈수록 부모와 상대적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렇지요? 그것이 정상적입니다. 자식이 커도 '아! 나는 어머니 아버지 품에서 젖 먹는 것이 제일이다'며 젖만 먹습니까? 일을 해야 합니다. 상하관계가 상대적 관계로 변천해 가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상하관계에서 상대적 관계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전후관계로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폐단이 있습니다. 우리의 범위는 상대적 관계로 사방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가정 대 가정이 아니라,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으로, 종족을 중심삼고 민족으로, 민족을 중심삼고 국가로 확대해 가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 개인을 볼 때 발전하지 않은 것 같지만 통일교회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후퇴하고 있는 것 같지만 도리어 통일교회는 발전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망하느냐, 개인이 망하느냐? 개인은 망할지 모르지만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 이 나라가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 수있느냐 하는 문제도, 저 지방의 골짜기에 사는 백성들이 얼마만큼 주권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느냐를 보고 그 발전의 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주권자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정책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둘 중의 한 분야에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그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를 결정합니다.

오늘날 민주진영을 대표한 미국도 마찬가지 입니다. 닉슨을 존중하든지 닉슨 행정부가 세운 정책을 존중하든지 둘 중의 하나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국민들이 그나마 존중하지 않으면 미국은 망합니다.

백성이 자기 나라의 행정수반을 얼마나 존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존중하는 도가 과거보다 강하게 되면 아무리 여건이 나쁘더라도 발전합니다. 주권자가 펼치는 정책은 존중하지 않더라도 그 개인을 존중시하면 그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또, 주권자 개인을 존중하지 않더라도 내세운 정책을 존중하는 데 있어서 그 강도가 과거보다 낫게 된다면 그 나라는 발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자신이 뜻을 중심삼고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겁니다. 선생님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일수록 망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을 주체로 삼고 상대적 입장을 취해 가지고…. 주체와 대상은 주고 받아야 됩니다. 이러한 원칙을 여러분 생활에 적용시킬 때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에 대해서는 절대시하면서 자기 자신은 괜찮다고 '나야 뭐' 하면 망합니다.그렇게 하면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지 않으면 번식이되지 않기 때문에 발전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창조원리가 그렇기 때문에, 이 철칙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되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선생님과 하나되지 못한다면 선생님이 내세운 뜻의 방향에 대해서라도 일치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여자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렇다고 여자만 동원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대신 동원한 겁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점심을 걸러 가면서 한 푼이라도 더 모아 그들에게 보내주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뜻과 더불어 일치된 자리나 뜻과 더불어 일치된 생활, 이 둘중의 하나라도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으면 망합니다. 아무리 큰소리를 치더라도 안 됩니다.

선생님은 좋은데 뜻은 싫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싫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 좋은데 다 못하니 하나라도 할 수 있다고 하면 남아질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좋은데 뜻은 싫다고 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앉아요? 선생님이 뭐 선생님을 위해서 있습니까? 둘 다 좋은데, 둘 다 해야 겠지만 둘 다 할 수 없으니 하나라도 해야지 하는 사람은 남아지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자는 주체의 자리에는 못 섭니다. 둘 다 하지 않으면 주체가 못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계승자가 되려면 주인의 뜻과 마음을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주체는 보다 더 나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주인의 마음과 뜻을 대신하게 될 때 계승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한 계승 자는 주체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옛날과 같이, 옛날 이상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선생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고 뜻을 위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으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망하는 거라구요. 하늘이 아무리 벼락 같은 은사를 내린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감응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통일교인은 하늘이 내 것이라고 주장할 아무런 무엇이 없어요. 그저 구경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돼요.

하나님을 좋아하든가 하나님의 뜻을 좋아하든가 둘 중의 하나는 좋아해야 합니다. 이것이 철칙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하더라도 뜻을 중심삼고 적극적으로 나가게 되면 하나님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뜻과 보조는 못 맞추더라도 주체와 보조를 맞추게 되면 하나님이 같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체라면 뜻은 상대입니다. 그래서 주체와 하나되든가 상대와 하나되면 주체와 대상 관계가 하나된다는 것이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 다 하나되면 주체를 대신할 수 있는 계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둘이 하나되기 어려우면 어느 하나와라도 하나되어야 합니다. 통일교회 선생님과 하나되든가 아니면 선생님이 제시한 뜻과 행동적인 면에서 하나 되든가 해야 합니다.

뜻은 어디까지나 상대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들 가운데는 매번 밖에 나가서 전도를 하는 사람만 전도합니다. 반면에 잠만 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입니다. 잠만 자는 사람은 독약을 먹고 자는 사람입니다. 뜻과는 벌어지게 되는 거예요. 차라리 몰랐으면 용서받고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체자와 하나돼야

이러한 문제를 71년부터는 어떻게 시정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선두에 서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아무리 선생님과 한 방에서 자고 깨도 나와는 상관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이 선생님과 보조를 맞추거나 뜻과 보조를 맞추거나 해야지, 둘중의 하나도 안 하면 망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과거도 없는 사람 이요, 미래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망하지 말라고 해도 망하게 됩니다. 공고한 과거를 갖지 못한 사람은 현재의 공고한 자리에 설 수 없고, 미래의 공고한 자리에도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뒷방살이하는 뒷방 영감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명의 중심, 여러분의 자극적인 힘의 원천지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날 싸워 온 나의 역사가 생생히 여러분의 가슴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싸우던 그 모습이 여러분에게 반응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대로 투영되어 여러분 앞에 언제나 자극적인 힘의 모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동기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안방에 가만히 앉아서 이마를 맞대고 기도나 하고 밤을 새우는 때하고는 다릅니다. 그때처럼 해 가지고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때는 키우는 때입니다. 키워서는 뭘 하느냐. 언제까지나 젖만 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키워서 일을 시켜야 하는 거예요. 대역자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겁니다. 대역의 자리는 하늘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그런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과거를 이어받지 못할 것입니다. 선생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것이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뜻과 동떨어지는 것입니다. 의욕을 가져야 합니다. 내일은 뜻과 더불어, 소망과 더불어 찾아오는 겁니다. 내일을 맞이하려면 현실에서 공고한 자리에 서야 하고 주체적인 입장에 서야 합니다. 미래의 주체가 되어야만 뜻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뜻 앞에 끌려가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붙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체이시니 하나님이여, 나는 죽더라도 당신의 뜻과, 당신과 하나되겠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맞이하려면 선생님을 중심 삼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원리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일해야 되겠다고 애쓰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박대통령이 지방에 갈 때면 지방의 관서가 모두 하나돼 가지고 정성을 다해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하늘 뜻을 수행해 가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얼마나 관심을 갖고 정성을 들이느냐는 것입니다.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을 중심삼고 뜻과 여러분은 관계 맺을 수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떠나가는 거예요.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자체를 정비할 때가 불가피하게 온다는 것입니다.

아침 밥을 못 먹으면 먹을 밥이 없나 하고 눈이 벌개 가지고 돌아다니지만, 뜻에 대해서는…. 뜻을 아침 밥만도 못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싸구려 뜻이 아닙니다. 밥 한끼는 못 먹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 전체를 소모시켜 주체자와 일체가 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눈물과 피와 땀을 개의치 않고 하늘 앞에 정성을 들이는 터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건달패들이 많습니다. 그런 패들을 중심삼고 뜻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뜻을 책임지고 나왔기 때문에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본을 보여 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때가 금년입니다. 이 3년노정 기간에…. 그래서 선생님이 지방에 갈 경우 될 수 있으면 지역장을 찾아보려고 하기 보다는 배치한 아주머니들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런 때가 이 3년 기간입니다. 이게 마지막 고비입니다.

1971년 2월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였습니다. 2월에는 통일교회를 중심 삼고 방대한 대사회작전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교회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교회에서는 잔치날인데도 불구하고 밥 얻어 먹으러 다닐 수 있느냐 이겁니다. 부모와 형제들이 지금 마음을 전부 여기에 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다고 하는 패들이 무슨 식구예요? 그런 패들은 구경꾼입니다. 다 망하게 됩니다. 망하지 말라고 해도 망합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과 갈라지게 됩니다. 불쌍하지만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안 갈라지면 선생님이 갈라치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중심삼고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잖아요? 이 말은 내가 지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원리 원칙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 자신은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 나는 어디를 가려고 나서게 되면 가는 길을 두고 기도합니다. 나는 창경원에 갈 때도 기도합니다. 정성은 보이게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모래알을 모아 태평양 바다를 메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과가 나타나길 바라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하는 생활 관계 맺는 생활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종살이하고 남을 위해 머슴살이하는 것은 공적으로 하늘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난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 것입니다. 다만 보고하고 정성들이는 것은 내 책임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나서는 길에 영계를 동원해야 합니다.

어제는 석포라는 곳에 갔다 왔습니다. 길이 험했습니다. 태백산맥을 넘으려니 눈이 왔습니다. 눈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눈이 왔습니다. 눈이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투쟁의 목표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신앙 길도 마찬가지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높은 곳에 가는 사람들은 남모르는 개척자의 길에서 이런 싸움을 통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고급차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지만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차가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갈 길이 더 바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구보끼 일본 협회장이 와서 선생님이 6시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보내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선생님을 만나러 오는 것은 자기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 개인의 목적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사고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책임자로 온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두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상의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을 세워 놓고 올라왔습니다.

사냥을 하려고 총도 가져갔기 때문에 일행이 하루 이틀 더 머물고 가자는 것을 재촉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선생님이 왜 그래야 되는지 같이 갔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꿈도 못 꾸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살아가는 생활관과 그들이 살아가는 관과는 천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보고하며 주체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에게 찾아와서 선생님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만나야겠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바쁠 때는 기뻐서 왔는지 슬퍼서 왔는지 표정으로 보고하라는 거예요. 선생님을 찾은 입장이 옛날보다 기쁜 일이면 어제보다 활짝 핀 얼굴로, 소망에 넘치는 모습으로 나타나 보고하라는 겁니다. 슬픈 사연이면 머리 숙이고…. 슬픈 그것이 보고라는 거예요. 간단한 겁니다.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 아니냐 이겁니다. 이건 그저 좋든 나쁘든 만나 뵙고 보고하겠다고 하니…. 바쁠 때는 바쁘게 넘어가라는 거예요. 기쁜 일이 있으면 기쁜 모습으로 보고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픈 모습으로 보고하라는 거예요. 나는 바쁜 사람입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외로운 사람입니다. 통일교회의 그 누구한테도 의논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의논할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주제에 입이나 다물고 있으면 좋은데 나발을 불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체와 하나되어야 되고 대상과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하나되면 번식이 벌어집니다. 그렇지 않아요? 주고받으면 반드시 번식이 벌어집니다. 그 번식될 수 있는 자리는 기쁜 자리인 거예요. 하나님 자신도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지요? 각자일 때는 주체가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합해야 가정의 주체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둘이 합하면 주체가 되지 않으려 해도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777쌍 여자들 동원할 때도 그래요. 자기 부인들 안 보낸 자 있다면 용서 못 받습니다. 차라리 관계맺지 않은 것이 낫습니다. 이런 못난 자식들처럼 살라고 부부로 맺어 준 거예요? 그런 자들 앞으로 두고 보라는 거예요. 몇 년 후 어떻게 돼나.

앞으로 이 못난 자식들을 중심삼고 싸워야 되겠어요. 여기는 결판장이라는 거예요. 누굴 위해 있는 거예요? 통일교회는 문선생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아는 여러분들이….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생님 생활이 그런 거예요. 그러기에 여러분도…. 선생님이 어디 가든지 주체적인 입장에 서려면 어머니면 어머니와, 협회장이면 협회장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보고받고 보고해 줄 수 있는 환경을 갖춰야 합니다. 보면 협회장은 제 2의 대상, 뜻의 대상입니다. 선생님 가정의 어머니는 심정의 대상입니다. 그러기에 심정의 반응이 뜻에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협회장은 언제나 보고해야 되는 거라구요.

선생님은 항상 거기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거예요. 가정에 무슨 일이 있으면 보고하라는 거예요. 보고하는 데는 자기의 뜻, 자기 개인의 감정을 중심삼고 보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보고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해결짓지 못하면 선생님을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뿌리에 가서 모든 것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전부 다 보고해야 합니다.

정석온 할머니가 보고하는 걸 들어 보니 유 협회장이 영적으로 나타나서 세상에 있을 때는 이런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고 싶을 때 마음대로 자고 먹고 싶을 때 마음대로 먹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더라도 보고하고 자고, 먹더라도 보고하고 먹어야 한다는 거예요. 생활 전체를 하늘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유 협회장이 생전에 교회가 쓸쓸한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정성을 모아서 식구들을 거느리고 예배 한번 못 봤다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죽고 사는 문제를 중심삼고, 식구들의 애절한 생명을 책임져야 할 협회장의 입장에서 밤을 새워 가면서 기도해 봤느냐 이겁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식구를 대해 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방을 해보았고, 교회에 나오지 않은 사람을 위해 얼마나 눈물을 흘려 봤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생활과 법도

그런 모든 원칙적인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여기 본부에 있는 자리가 쉬운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이 제일 어려운 거예요. 밥도 마음대로 못 먹는 겁니다. 선생님이 있는데도 불구 하고 왔다갔다해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이런 것 모두 정비해야 됩니다. 앞으로 선생님이 여기를 떠나게 되면 선생님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법이 있는 거라구요. 선생님이 하나님의 내적인 배후를 갖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배후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걸리는 게 많습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교회 마루 한번 닦아 봤어요? 유리창 한번 닦아 봤어요? 교회 일에는 정성들이지 않고 자기집 일에만 정성들이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걸립니다, 자기 집 유리창이 깨지면 갈아끼우기 위해 별의별 일을 다하면서 교회 유리창이 깨지면 남의 집 일같이 생각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지금까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떠하든지 이 길을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구장이나 지역장들은 선생님 지갑에 있는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자기 지구를 위해서 쓰는 데 선생님이 전체를 위해서 쓰는 것보다 가치있게 쓸 자신이 있느냐? 그러면 좋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함부로 날뛰지 말라는 겁니다.

또, 앞으로 여러분이 교회 물건을 함부로 가져 가면 벼락맞습니다. 두고 보세요, 몇 대 조상이 걸립니다. 교회 물건은 성물입니다. 이것에 손을 대면 사탄보다 더하다는 겁니다. 이것을 자기가 보관하겠다구요? 도둑질 해서 보관하는 것 봤어요? 제단 위에 놓은 기념이 될 만한 그릇 같은 것을 자기 집에 갖다 놓고 보관해도 되느냐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화가…. 그 물건이 네 품에 있고 싶어하느냐, 선생님 가까이 있고 싶어하느냐? 물건으로부터 참소받게 되면 걸립니다. 가져 가는 놈들은 두고 보세요. 그런 녀석이 통일교회 교인이 되겠어요? 가져 가게 되면 선조들까지 걸려 듭니다. 알맹이는 다 빼앗기고 껍데기만 쓰고 나가게 됩니다. 그런 자들의 후손이 어떻게 되나 두고 보세요. 3대 이내의 후손이 어떻게 되나두고 보라는 거예요.

물론 생활에 관한 법을 다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법에 의하면 여러분은 여기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 처한 여러분이 새벽에 여기까지 와서 졸아요? 데데하게 여기 와서 졸라고 이 장소를 마련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일요일 아침 예배 시간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참석하게 되면 걸립니다. 자기는 잘난듯이 비판하지만 결국 그는 걸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가는 길에는 언제나 온유겸손해야 하는 거예요. 선생님 가정에 대해 비난하며 얘기하는 부인들 두고 보세요, 어떻게 되나. 그런 자들이 선생님 가까이에서 사나 보세요. 전부 흘러가 버리고 맙니다. 선생님은 인정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예요.

여러분이 원칙을 넘어가느냐, 아래에 있느냐, 옆으로 가느냐. 한 중심을 중심삼고 전후 좌우 상하가 어떻게 되어 가느냐? 정상적인 입장에서 전후 좌우 상하관계를 맺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등등의 문제를 중심삼고 언제나 살피고 있습니다. 전후 관계에서 걸리면 도리어 역적이 되는 거라구요. 여러분은 하늘의 법도를 중심삼고 자기 생활관을 세울 줄 알아야 됩니다. 그저 함부로 사는 선생님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생활하는 데 있어서 모든 규범을 중심삼고 온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알아야 될 것은 어느 자리에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중심삼고 볼 때 과거를 상속받을 수 있는 나 자신이 됐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과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재도 마찬가 지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생활에서 부활의 특권을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늘이 어디로 가느냐 이거야. 통일교회면 통일교회의 주류가 어디냐? 선생님 자신도 거기에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마음대로 한다면 스스로 고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머물지 않고 미국 같은 외국에 가서 기반을 닦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예요.

뜻을 위해 수난길의 선봉에 서야

탕감노정은 수난의 길로 출발했기 때문에 수난의 길에서 열매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영광의 길로 출발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고난의 길로 출발했기 때문에 나라가 인정할 때까지 고난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대한민국 3천만 국민이 통일교회 문선생이 수고하고 수난길을 갔다고 증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안이한 자리에서 편안히 잠을 잘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기도하는 것도 그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지만 선생님은 교회가 문제가 아닙니다. 남한이 문제가 아닙니다. 남북한이 문제입니다. 민주주의가 문제가 아닙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문제입니다. 그런 문제를 중심 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원수를 중심삼고 해결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원수를 굴복시키기 위한 동기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중심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현재 통일교회가 주력하고 있는 움직임은 통일교회와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통일교회 자체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민족을 위한 것이요,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승공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자체로 보면 이것은 출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뜻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수난길을 지금 닦아 나가야 합니다. 또한 탕감노정은 수난길을 통해서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종족 이나 민족의 수난길을 탕감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수난길을 탕감하는 데 있어서 내가 선두에 서야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설 수 없습니다. 이것만은 틀림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아직까지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언제나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고달프고, 언제나 조심하고, 언제나 긴장하고 있는 거예요.

어느날은 눈이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놈의 눈 !' 그런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생각하고 이것을 해야 하는데 눈의 방해를 받을수 없다 이거예요. 몸이 피곤하면 '이놈의 몸뚱이!' 하여 몸과 싸우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증거하지 않는다면 제삼의 종교를 통해서 증거할 것입니다. 본부에 있는 부장이나 간부들이 증거하지 않으면 불교인이나 유교인들이 통일교회를 증거할 것입니다. 자기의 체면과 위신이 깎이고 하늘의 권위가 양도되고 있다는 서글픈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선생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원해 가지고 선생님을 만나기를 고대했고, 자기들이 정성을 들여 가면서 통일교회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늘은 통일교회를 세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외부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을 끌고 가다가 시간이 없게 되면 놔두고 가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나중에 오지 못하면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2월 마지막 안식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면 내일을 맞자…. 그런데 여러분이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는 거예요. 과거를 착실히 맞이하지 못한 사람은 오늘을 확실히 맞이할 수 없고, 오늘을 확실히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내일을 확실히 맞이할 수 없는 거예요.

과거는 어디로부터 왔느냐?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우리 선조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모든 중심이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늘을 위해서 내 생명 이상 인연을 맺어야겠습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 있느냐? 선조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위해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위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를 위해 있느냐 이거야. 아버지를 위해 있다면 아버지 뜻을 위해서 가야 합니다. 이 원칙은 불가피합니다.

금후에 우리가 해야 할 일

그러면 현재 여러분에게 뜻을 위하겠다는 의욕이 있느냐는 거예요. 의욕이 없다면 이미 병이 든 겁니다. 뜻이 눈앞에 다가오는 세계적인 경향을 통해 볼 때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할 중대한 시점에 와 있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때에 원리를 아는 사람으로서 여기에 의욕에 불타지 않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반대하며 원수시해 온 부모가 현재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 십자가의 고통거리가 해결됐다고 해서 '아, 이제 나는 됐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자기 개체는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좋다고 해야 합니다. 죽어도 괜찮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피해를 입고, 뜻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통일교회 가는 길은 수난의 길에서 출발했지 영광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언제까지 ? 이 민족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민족을 넘어설 때까지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기쁨을 맞아 새로운 봄날로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출발할 수 있는 씨를 뿌려서 기쁨의 세계를 무대로 삼고 하늘 앞에 인연을 맺고 가야 하는 길이 통일신도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선생님도 이 길을 필생의 목적으로 삼고 가야 할 운명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가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반대하고 한국 민족이 반대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운명이 그런 것입니다. 다시 이 민족을 살려야 합니다. 민족의 역사 가운데 계승할 터전이 없기 때문에 하늘의 역사를 계승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계승된 현재의 입장에 이 민족을 동참시키고자 하는 것이 통일교회가 하려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남아진 사명이 이 민족 앞에 있어서의 십자가의 길인 것을 감수해야 됩니다. 여기에 보조를 못 맞추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승리가 거두어지는 날 기쁨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여기에 동참했던 사람과 더불어 나누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부패상을 바라볼 때 그들을 믿고 나라를 맡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수년간 싸우며 지금까지 어려움을 극복해 나온 것은 이러한 부패상을 깨끗이 정비하려는 거예요. 여야가 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 이것을 정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다 하면 그들이 아무리 싸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반을 닦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통일교회는 입이 없어서 말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말 못한 것은 한 번이라도 하나님이 받아주었다가 실패하면 하늘땅이 망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기반을 확보하여 대비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나라를 넘어설 수 있는 기반, 세계를 밟고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닦자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맞고 억울하게 몰리고 억울하게 이용당했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이용하고 억울하게 몰고 간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굴복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감정이 격할 때도 있는데 이 감정은 누구의 감정이냐? 통일교회 문 아무개의 감정이냐? 그것은 하늘의 감정이요, 세계 인류의 감정이요, 민족의 감정입니다. 우리는 억천만 원수의 총칼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입니다. 내가 통일사상을 제창한 장본인 입니다. 지구장, 지역장들 어렵게 살라 이거야. 거 당연하다 이거야. 우리가 민족에 대해 책임을 못 했기 때문에 밥을 굶어야 합니다. 그게 사는길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보면 진정한 애국자는 말이 없었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 그 마음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절개를 가지고 외로운 자리를 피하지 않고, 안팎으로 외롭게 산 사람일수록 그렇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애국했지만 말기에 가서 알랑알랑한 사람일수록 애국자인 양했습니다.

내일을 맞기 위해 하나되어 싸워 나가야

여러분은 이것을 알고 내일을 계승해야 하겠습니다. 내일을 맞자! 내일을 맞을 수 있는 풍토를 나 자신이 조성하고 있는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 현재 공고한 터전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통일기반확보'라는 표어를 정했습니다. 먼저 몸과 마음이 하나되라는 거예요. 과거에는 소원으로만 바랐지만 이제는 마음과 몸이 하나되라는 겁니다. 남자 여자가 하나되라는 것이요, 사위기대가 하나되라는 거예요.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이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또한 종족을 중심삼고 민족이 하나되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되는 데 있어서는 기쁠수 있는 행동을 바라고 좋을 수 있는 행동만을 바라는 사람을 중심삼고는 절대 하나되지 않습니다. 희생하는 사람, 십자가의 수난길에 있어서 뭇사람을 위해 죽음의 피를 뿌리고 눈물을 뿌린 사람을 중심삼아야 하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통일교회는 핍박으로 심었으니 핍박으로 거둔다는 거예요. 그러니 기쁨이 있다고 기뻐할 것이 아닙니다. 그 기쁨을 자기의 기쁨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기쁨으로 돌려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후에 기뻐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현재의 기쁨 이상으로, 하늘이 기뻐한 그 이상으로, 프러스 되어서 상속받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시대감각에 예민해야 됩니다. 정세에 예민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내일을 맞을 수 있는 풍토를 마련 해야 되겠습니다, 그 내일이라는 것은 현재와 과거가 벗어나서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내일에는 반드시 현재와 과거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복귀를 위해 싸워 나가는 마당에 있어서, 여러분은 내 가정은 비록 이렇지만 이러한 가정이 있다 이거야. 내 자체는 이렇지만 이러한 개인이 있다 이거야. 세계 만민을 대신한 우주적인 가정을 중심삼고 내가 하나의 가지가 되어 거기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감사의 마음을 갖고, 하늘이 바라는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라는 이 엄청난 목적을 중심삼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면 아무리 어려운 자리라 해도 하늘이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아버지 ! 내가 이런 어려운 자리에 섰으니 같이하여 주옵소서' 하는 시시한 기도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민족과 국가를 위한 시련과 고통을 자신이 짊어지고 그것을 극복해낼 수 있는 강직한 성격과 강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하늘을 위한 대신자가 되고 후계자가 되는 거예요. 충효를 남길 수 있는 내 개체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상은 받아서 뭘해요? 과정에서의 상은 필요없는 거예요. 칭찬은 받아서 뭐해요? 과정에서의 칭찬은 필요없는 겁니다. 맨 나중에 가서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도리어 과정에서 받는 칭찬이 나를 망치게 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가 가는 길이 가면 갈수록 십자가의 길이요, 가면 갈수록 어려운 길이지만 통일교회 문 선생한테는 보람있는 길입니다.

후퇴의 길이 아니라 보람있는 길입니다. 과거에도 그렇게 싸워 나왔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한마디 말은 세계의 어떠한 정객들이 말하는 이상의 문제를 제시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선생님이 행동 하는 결과는 세계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배후의 원동력이 되는 거예요. 그런 신념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얘기를 들을 때는 엄청난 얘기 같지만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변천되어 가는 것입니다. 정치가들이나 역사가들이 역사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가들은 역사를 기록할 뿐이요, 문인들은 사회 환경을 기록할 뿐입니다. 심정 세계를 발전시켜 가는 것은 하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해이해진 자신을 수습하려면

여러분이 해이해진 자신을 수습하는 방법은 통일교회의 주체적인 주류적인 방향을 감정해서 거기에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선두에 선 주체자가 있다면 그 사람보다 강력한 신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에게 '하나님 날 도와주소'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도와주게 돼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이 못 된다면 혼자는 못 가는 겁니다. 천 지 인(天地人) 아녜요? 사람만으로는 절대 안 되는 거예요. 천 지 인입니다. 하늘땅이 있어야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드시 상대나 주체가 없으면 기쁨이 없는 거예요. 힘은 주체와 대상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이 원리가 아니냐 이거야. 그래서 뜻을 주체로 하고 대상의 자리에서 행동으로 움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선생님을 주체로 하고 여러분은 대상의 입장에서 명령하는 대로 행동 하라는 것입니다. 간단한 거예요.

그것이 어렵거든 여러분이 뜻길을 출발하게 될 때, 어떤 때에 하나님이 은사를 주었느냐, 어떤 때에 하늘이 나를 구해 주셨느냐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보다 더 비참한 자리로 내려가라는 거예요. 내려 가면 하늘이 도와줍니다. 여자로 말하면, 한겨울에 남편에게 머리를 깎인채 맨발로 쫓겨나 눈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애달파서 하늘을 부를 때 하늘이 같이해 주시던 그 은사, 그 은사를 잊을 수 없거든 그 이상의 자리까지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의 해방의 날을 위해 쫓겨 나는 한이 있더라도, 감옥살이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를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예요. 십자가로 시작했으니 십자가로 거두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애달프게 누구를 사모하는 심정을 가졌으면 끝까지 사모하라는 거예요. 자기 몸을 중심삼고 봉사로 출발했으면 봉사로써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있더라도 절대 후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열매맺힐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고비를 극복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이 걸은 그 자체로 하여금 자기를 증거할 수 있는 재료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시집을 간 후에는 남편을 중심삼고 절개를 지키라는 것이 무엇이냐? 처음 가졌던 마음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라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가면 자식이 없더라도 가정생활에서 아내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비록 애기를 낳지 못했다 하더라도 시집갈 때의 뜻은 변치 말라는 겁니다. 환경에 따라서 환경에 보조를 맞추는 그런 놀음을 나는 못 하는 사람입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힘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힘이 없다고 편하게 낮잠 자면 안 됩니다. 그럴 때는 이방 종교인을 만나 보세요? 세상이 어떤지 한번 세상 구경 하라는 겁니다. 세상에 나가면 답답합니다. 그러니 나갔다간 다시 기어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극을 받아 자체적으로 보충 보강할 수 있는 스스로의 대비 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이 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선생님이 여러분을 이끌고 갈 수 없는 거예요.

선생님이 맡은 바의 책임도 중하고 여러분보다 가중된 책임을 짊어지고 있으니 옛날처럼 시간을 내서 대할 수가 없습니다. 할 말이 있으면 길가에서도 하라는 것입니다. 방에 들어가 얘기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점점 바빠지니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선생님이 여러분을 멀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수없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여러분이 보조를 같이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내일을 맞지 못합니다.

아무리 선생님이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를 하더라도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공식대로 가지 못한 사람은 또 가야 합니다. 공식을 거쳐 가야 합니다. 축복가정 여러분들 전부 세상 일을 태평하게 하지만 전부다 가야 합니다. 공식대로 해야 할 때가 오나 안 오나 두고 보세요. 하지 않고는 못 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통일교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킬 수 있는 기반을 가져야 됩니다. 과거와 현재가 미래를 입증할 수 있는 공고한 기반이 되어야만 부끄럽지 않는 내일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일을 맞기 위한 현실을 만들어야

엊그제 어떤 사람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아주 처량한 편지였습니다.

통일교회를 나간 사람이었어요. 통일교회를 나가서 갈 데가 있나요? 또 일본 청년 한 사람이 이러고 저러고, 구보끼 뭐 어떻고 어떻다고 하다가 제명처분을 당했다는 거예요. 이놈의 자식, 일본에서 제명처분당한 녀석이 본부에 와서 통과될 것 같아요? 내가 쫓아 버리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잘나고 무슨 학박사라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무시하고서 현재를 이야기할 수 있는 법이 없습니다. 여기 아주머니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체면도 형편도 사정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필요하니 나를 만나겠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무슨 장난거리예요? 선생님은 장난하는 사람이 아니라 심각한 사람입니다. 자기들이 주체예요? 너무 자기 자신을 높게 생각한 거예요.

자기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누가 그렇게 대해 주나요? 높게 되려면 하나에서부터 연결되어야 되는 거예요. 저 밑창까지 찾아가 하나의 조각돌에서부터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남아져 꼭대기까지 연결되어야 내 것이 되는 겁니다. 과거에 누가 기반을 닦았는지 모른다고 해서야 되겠어요? 그런 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영통하는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지금도 영통하는 사람이 들어 와서 이러구 저러구 합니다. 그러나 '정성들이는 법도나 정성들이는 과정에 대해서는 내가 공인하는 것이다. 여기에 잘못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잘못된 사람에 대해 참소하면 그럴 수 있다. 어느 기간까지는 책임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이다. 그 여유 기간까지 책임 못하면 처리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을 중심삼고 끌고 나가겠다는 생각 안 합니다. 하나님은 1차 2차 3차, 이렇게 단계적으로 끌고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뜻을 중심삼고는 내가 무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뜻을 중심삼고는 대상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뜻을 중심삼고 무한히 준다는 것은 주체를 점령할 수 있는 비법입니다. 내가 받겠다 받겠다고 하면 필요한 것 하나밖에 주지 않습니다. 둘 셋까지 안 주는 것입니다. 둘 셋 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갈 길이 아예 막혀 버립니다. 하늘은 그런 일 안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알고, 내일을 맞기 위한 현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1971년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북괴와 혹은 아시아 정세를 볼 때 그야말로 밤잠을 자지 않고 가려 가야 할 때인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과 마음을 묶어 하늘 앞에 몽땅 바쳐야 합니다. 방심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교회가 냉랭하면 냉랭할수록 여러 분은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아침에 왜 여기에 왔습니까? 선생님을 보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왔다가 갈 때 무엇을 갖고 가느냐? 올 때 무엇을 바라고 오느냐? 이왕 오려면 시간을 지켜야지 늦게 오려거든 아예 오지 마세요. 가을에 낫을 들고 추수하는 농부가 되어야지 삯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이삭을 주으러 온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이 사람되나 두고 보세요. 그런 사람에게 선생님은 소망도 두지 않거니와 의논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관심을 갖지 않는데 누가 관심을 갖겠어요?

교회가 어떻고 선생님이 어떻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선생님이 그런 사람들을 위한 선생님입니까? 하나님 위한 선생님입니다. 그런 자들 다 떨어져도, 다 죽어 자빠져도 선생님은 망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렇게 나가려는 사람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래 해봐라…. 그거 갔다가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돌아올 자신 있으면 해보라는 겁니다. 나갔다 돌아올 자신이 있냐고 내가 꼭 물어 봅니다. 진정 그러냐. 그러면 해봐라…. 가는 거야. 갔다 돌아올 때는 책망하는 거예요. 결과가 나빠지더라도 그것은 선생님이 잘못한 것이 아니예요. 하늘이 작전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죽어도 해보겠다니 해보라고 한 것입니다. 망하든 흥하든 해봐야 끝장나거든. 이걸 그냥 돌렸다가는 또 돌아가는 거야. 그럴 때는 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미래를 맞으려면 과거와 현재를 상속해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관계에 있어서 여러분은 선생님과 뜻을 주체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계승자가 되는 거예요. 뜻과 주체(선생님)와 행동적인 면에서, 심정적인 면에서 일체된 사람은 주체의 자리를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을 다 좋아하지요? 어제께 점촌에 나가 있는 협회장 부인을 만났습니다. 뭐 정성들이고 기도해서 그런지 몰라도 집회를 끝내고 다 갔고, 자기도 가려고 버스 정류장까지 갔는데, 하도 가고 싶지 않아서 되돌아왔다나? 그래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고 좋아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협회장은 섭섭해 하지 말라구요. '남편이나 자식보다 어머님 아버님 그리워 눈물짓는다나? 이제야 사람이 됐구나 그랬어요. 그거 깨달은 거예요. 그러나 객지에 나가 생활해 보고 나서, 부모가 죽은 후에 슬퍼해 봤자 효자가 안 되는 거에요. 그래도 그렇게라도 깨달았기에 이제부터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게 사는 길이예요. 자기 자식이나 자기 남편만을 생각하게 되면 불효입니다. 뜻 때문에 살아야 하는 겁니다. 선생님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통일사상이 바로 그런것입니다.

내가 어디 갔다 오더라도 어머니나 자식들 위해 무어 사 가지고 오지 않아요. 마음이 허락지 않아요. 약속을 했으면 할수없지만…. 점촌교회는 8만 원을 주고 방을 얻었다나? 돈이 없어서 조그만 방을. 그래서 내가 지역본부 확장하라고 가지고 갔던 돈을 주고 왔지만 말야. 임지에 나가 있는 아주머니들 이번에 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다 망합니다. 임지에 내보낸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선생님도 사람인데 여러분들을 고생 시키고 싶겠어요? 그러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가정에 있어서 사위기대 복귀도 해야겠고, 또 가야 할 탕감노정이 남아 있고, 모자 협조노정이 남아 있기에, 이것을 여자가 안 하면 안 되겠기에 내모는 거예요. 그런데 남편들이 함부로 오라 가라 편지하고 있는데, 그거 다 걸립니다. 선생님에게 승락받고 편지하라구. 알겠어요? 아들딸이 죽게 되고 남편이 죽게 되었으니 오라….

책임을 다한 후 기쁜 내일을 맞자

이런 문제를 가지고 나한테 문의해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네 맘대로 하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가겠으면 가고 말겠으면 말라는 거예요. 공식은 이미 결정돼 있는 거야. 선생님이 가정을 버리고 삼팔선을 넘을 때 생각 안 해 봤겠느냐는 거예요. 이북에서 선생님은 감옥살이를 하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가정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남으로 내려와서도 집으로 편지 한 장 안 했습니다. 색시가 어떻게 되든 자식이 어떻게 되든 편지 한 장 안 했습니다.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거예요. 하나님 앞에 바치고 하나님 앞에 약속했으니 아들딸들을 죽이겠으면 죽이고 말겠으면 말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들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아무리 상거지같이 되어도 누군가가 도와주게 되는 거예요. 절대 안 죽습니다.

집을 떠날 때 애기들이 뭐 어떻고 하는 사람은 다 그만두라는 거예요. 내가 아는 하늘은 그런 자와는 상관없습니다. 애기들이 아파서 골골한다고 하면서 지방에 가서 활동 못 하고 애기 생각하며 눈물 흘리면 안 됩니다. 모든 걸 훌훌 벗어 버리고 나가 보라는 거예요. 잘 자란다는 거예요. 어머니가 없으면 불쌍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더 잘 자랍니다. 뜻을 위해 가는 길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번에 동원되지 않는 부인들이 있으면 앞으로 상대로 생각하지 마세요. 뜻을 위한 실질적인 여자 실질적인 남자가 아니면 쫓아 버려요. 뜻을 더 사랑하라는 거예요. 뜻을 위해야지 남편을 위해 ! 자기를 위하는 사내는 따라가지 말라구.

남자에게는 여자를 주관할 책임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 같으면 싸움을 해도 괜찮습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은 그러면 안 되지만 말입니다. 장모들이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공격해야 합니다. 대신 뜻을 위해서 남자들은 목을 걸어야 합니다. 별 수 없다는 거예요. 앞으로 여러분은 뜻을 위하는 데 있어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 오늘은 2월 마지막 날입니다. 국제정세의 혼란상을 아버지께서 잘 아시고 계시옵니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갈 길을 가깝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아시아와 세계를 대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에 공명 공감할 수 있는 동참의 자리에 저희들을 내세우기 위한 아버지의 최후의 때요, 최후의 가려내기를 할 수 있는 이 시대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대한민국이 금후에 가야 할 길을 보살펴 주시옵소서 .

인간은 언제나 무지하기 때문에 당신의 뜻과 섭리의 노정에 보조를 맞출 수 없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통일교회 신도들도 뜻을 안다고 하지만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아무것도 모르는 이 민족이 어떻게 하늘 뜻에 보조를 맞추겠습니까? 이런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실례를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여, 이 나라의 운명을 책임져 주시옵소서. 이 나라 이 삼천만 민족을 다시 한번 긍휼히 보아 주시옵고, 과거의 모든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옵니다. 지금까지 이 민족이 통일교회를 배반했었지만 우리를 필요로 할 때가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저 땅 끝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존엄하신 그 권위와 능력이 어떠한 존재물에도 벗어나지 않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한 민족의 금후의 장래까지 사랑의 손길로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의 뜻을 놓고 이 나라 이 민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주권자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나라를 생각하는 것을 볼 때, 자기의 힘이 아무리 강하고 자기가 아무리 우수하다 하더라도 때가 차면 기울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주권자들로부터 삼천만 민족이 그런 자리에 설 것이 아니라 하늘에 보조를 맞추어아 될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것을 가르쳐 주고 영향을 미쳐야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입장임을 생각하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나라를 붙들고 나왔고 서러움을 받으면서도 나라를 붙들고 나왔사옵니다. 통일교회는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나왔습니다. 나라가 손상을 입고 상처를 입을까봐 수치와 체면을 버리고 나온 것은 이 민족과 하늘의 위신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국가를 바라보고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저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여, 저희들이 체면을 세우는 것도 당신의 수고의 공적으로 말미암은 것이옵니다. 당신의 아들딸이 결과가 비참하여 사탄에게 조롱을 받을까봐 염려되오니 당신이 여기에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악한 자리가 아니라 선한 자리, 선한 자리가 못 되거든 선을 위하는 자리에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오늘도 내일도 아버지를 향하여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를 향하여 승리의 그날을 위하여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며 이 길을 가야 할 것이 저희들의 책임인 것을 알고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은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사랑 하여야 할 아버지를 진정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사랑하여야 할 아버지의 사정을 알아 가지고 주체와 대상이 하나될 수 있는 그 자리를 소원하는 것이 부자의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언제 아버지께서 이 환경에서 마음놓고 저희를 사랑해 보셨습니까? 온세계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딸 앞에 머리숙여 '존귀 찬양을 홀로 받으시옵소서' 하는 충성을 받으신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기껏해야 한 집안, 한 교단밖에 없었던 불쌍한 아버지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민족과 국가와 세계까지 넓혀 드려야 할 것이 저희의 책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에게는 죽더라도 세계를 향하여 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수난길을 가더라도 세계를 아버지의 안식의 터전으로 마련하여 드려야 할 저희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온갖 정성과 온갖 수고를 기울여 충효의 도리를 다하여야 할 저희 타락한 후손인 것을 알고,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지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강하고 담대하여 하늘 뜻을 붙들고 정성을 다하고 충절을 남기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희 손목을 붙들고 내가 가는 길을 같이 가자고 권고하고 사정을 할 수 있는 아들이 못 된 것이 한이었고, 딸이 되지 못 한 것이 한이었습니다. 당신의 손길을 뿌리침으로써 하늘을 눈물 흘리게 한 후손 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이런 비통한 사연을 남기는 아들딸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과거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 아들딸, 대견하다고 칭찬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스스로 몸부림치는 자녀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2월 마지막 날을 맞이하였으니, 내일이면 삼일절을 맞이합니다. 3월이 오면 만물이 소생하는, 꽃 피는 봄을 맞이하게 되옵니다. 71년도는 저희 통일가가 소생의 한때를 맞이할 수 있는 축복의 한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통일가의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때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난노정을 넘을 수 있는 생명의 씨를 갖지 않으면 안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그럴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내일을 맞이해야만 되겠습니다. 과거를 맞지 못한 한을 가지는 것보다 내일을 맞이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해야 되겠습니다.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채 내일을 맞을까봐 두려워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내일을 맞이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여기에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갖게 해주시고, 모험이 필요하면 모험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자기의 생명까지 내놓겠다는 결의를 해야 할 때는 결의를 할 수 있게끔, 아버지, 힘을 주시옵소서. 스스로 생의 승리의 업적을 남길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한에 널려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그리워 찾아오는 노정 위에도 영광이 깃들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자비와 사랑의 손길로써 당신의 자녀를 품고 위로해 주시는 하나의 은사의 터전이 오늘 이 안식일에 머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일본에 있는 당신의 식구들과 한국에 있는 당신의 식구들이 하나되어야 하겠습니다. 아시아를 움직일 수 있는 통일의 역군이 되고 아시아의 새로운 기치를 드높여 하늘땅 앞에 신의 대열을 만들고 인류애에 넘쳐나는 새로운 사상으로 봉화를 들고 나설 수 있는 거룩한 움직임이 온 만민 앞에 드러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보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자녀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가냘픈 그 모습 들이 씨가 되고 뿌리가 되어서 싹이 트고 나무로 자라나 세계를 덮고 남을 수 있는 그날까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하시고, 하늘을 위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필승의 권(圈)을 이룩하여 세계와 더불어 찬양할 때까지 남아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내일을 맞이할 수 있게끔 모든 생활을 정비하고, 주체와 대상 관계의 인연을 생활권에서 스스로 포섭하고 스스로 소화해 나갈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내일을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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